5. Weathering With You

 

※ 원작자분과의 협의 하에 게제하였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 이 작품은 Pixiv의 TMC님의 「햇빛 저편의 언덕길에서」시리즈입니다.

(원작자 Pixiv 링크)

 

 

 

- Weathering With You

제가 「날씨의 아이」를 보고 느꼈던 점, 제가 생각하는 「괜찮음」의 의미를 담아보았습니다.

이 최종화를 쓰기 위해, 여기까지 잇기 위해 쓰기 시작한 시리즈입니다. 부디 최종화만이라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Weathering With You는 좋은 구절이지요. 「날씨의 아이」에 있어 도중에도 물론 그렇지만 엔딩 이후에도 말 그대로 「너와 함께」극복해 나간다는 의미의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꽃에는 여러가지 꽃말이 담겨 있다.

색깔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지는 장미나 카네이션, 그리고 튤립처럼, 지금 발밑에 피어있는 수국화도 마찬가지로 그 자그맣게 피어있는 모양새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꽃말을 담고 있다고 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런 이야기를 나는 문득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 수국화의 꽃말 알고 있니? 호다카.」

잿빛 하늘 아래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흠뻑 젖은 작은 묘비. 마치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마치 그곳에서 이승을 건너다보듯이 그저 고요히 서 있다. 비교적 최근에 새겨진 듯한 비문, 아마노 메구미라는 이름이 새겨진 그 비문을 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의 묘 앞에서 합장하고 있던 히나가 문득 일어섰다. 우산 아래 피워둔 향에서 가느라단 연기가 일렁이며 피어오른다.

「색에 따라 의미도 다르겠지만, 수국화엔 사실 다른 꽃말도 하나 더 있어.」

모두의 머리 위로 빠짐없이 쏟아지는 그 비가 불규칙적으로 우리의 우산을 두드린다. 묘를 둘러싼 잔디엔 각양각색의 수국화가 피어 있었다. 비가 그치지 않는 도쿄는 그 생태계조차 조금씩 바뀌어 가는 듯, 이미 백중이 지나 여름이 끝나갈 무렵인데도 아직도 수국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가정의 화목이란 의미도 있대. 자그마한 꽃들이 한데 모여 피어 있으니까. ──우리 엄마도 좋아했었어. 그래서 입원하셨을 때도 병실에 놓아뒀었거든. 엄마를 위해 나기랑 같이 종이접기로 수국화를 만들었어.」

새어나오듯 가냘픈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희고 붉은 그리고 푸른색을 담은 그런 자그마한 꽃받침. 그 시절 그녀가 분명 소망을 담아 하나씩 하나씩 접었을 것이 틀림없는 그것들. 언젠가 꼭 어머니께서 깨어나주시길. 아직 겨우 중학생이었을 그 무렵, 몇 달이고 병실에 잠들어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그녀의 마음을 떠올리며 난 괴로움을 곱씹고 있었다.

히나와 함께 온, 그녀의 어머님이 잠들어 있는 묘지. 적어도 그곳에서 편안하시길,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를 지켜봐주시길 빌며, 나 역시 어머님의 묘비 앞에서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성묘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야 저편까지 비가 먹먹하다. 그 때, 옆의 풀숲이 보일 듯 말 듯 소리내며 흔들렸다.

돌아보자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앙증맞은 우산을 쓰고 빨간 수국화들을 주섬주섬 모으며 웅크려 앉아 있었다.

이런 아이가 혼자 올 만한 곳이 아닐텐데, 혹시 함께 성묘온 가족과 길이 엇갈린 건지도 모른다. 문득 바라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이기에, 우린 함께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하고 있니?」

아이가 겁내지 않게끔 다정한 목소리로 히나가 말을 걸었다.

「꽃 보고 있었어.」

아이는 그대로 웅크린 채 우릴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국화? 너도 좋아하니? 이 꽃.」

「엄마가 좋아했던 꽃이야. 빨간색, 보라색, 여러 색이 섞여 있어서 해질녘같은 색이래. 엄만 해질녘이 좋대.」

「그렇구나. 멋진 어머님이시네.」

수국화를 좋아하는 어머님. 그 아이로부터 왠지 예전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본 건지 히나는 문득 웃음지었다.

「그럼, 엄마는 어디 계셔? 우리가 데려다 줄게.」

히나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일어서더니, 우리 뒤쪽을 그저 묵묵히 가리켰다.

 

「아카네! 대체 혼자 어딜 갔던 거야, 걱정했잖아.」

아이를 데리고 몇몇 무덤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아버님인 듯한 사람이 우리 쪽을 보고 안도한 듯 우릴 불렀다. 아카네라고 불린 아이는 기쁜 듯 아빠에게 달려가 안겼다.

「데려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아버님이 우릴 보며 고개를 숙였다. 주위엔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몇 명인가 서 있었지만, 그 중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수국화를 찾다 보니 먼 곳까지 와버렸던 모양이에요. 수국화는 석양을 닮았다고, 어머님이 좋아했던 꽃이라고 이 아이── 아카네 쨩이 알려줬어요.」

히나가 그리 말하자 그는 슬픈 듯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그런 말을──」

「여기 있는 엄마도 수국화 볼 수 있는거지?」

응석부리듯 아빠의 발을 끌어안으며 손짓하는 아이의 손끝, 빙글게 둘러선 사람들 가운데엔 그저 조용히 자그마한 묘비가 서 있었다.

 

「3년, 아니 그보다 좀 더 오래전 일이군요.」

우산 끝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그는 우리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리게 되기 전, 이 아이가 지금보다도 더 어렸을 적입니다만. 그녀가 죽기 직전, 다함께 석양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해질녘, 그러니까 해가 지기 직전이죠. 낮과 밤이 뒤섞여 보랏빛으로 물든 그 하늘색이 이상하리만치 이뻤던 것 같습니다. ──이 아이도 그걸 기억해주고 있는 거겠지요. 분명 엄마를 떠올리고 있는 거겠지요. 그 때 봤던 하늘을 닮은 이 수국화를 볼 때마다.」

우산 아래에서 사랑스러운 듯 그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는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아이의 이름¹⁾도 그렇습니다만, 그녀는 석양을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비가 와선 이룰 수 없는 소망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아이에게만은 다시 한 번, 그때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고 싶군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나는 손을 마주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게, 그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가족분들과 헤어진 뒤 묘지를 벗어나, 나는 히나와 함께 역을 향해 걸어 내려가고 있다. 우산을 기울여 바라보자, 언덕 위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멀리 떨어진 건물 틈새로 잿빛 바다가 비쳐보인다.

여기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풍경. 결코 바다가 아닌,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을 거리의 흔적.

형태를 바꾸어버린 이 세계. 거기에 휘말려버린 사람들의 말. 그치지 않는 비와 그칠 길 없는 사람들의 슬픔을 날것으로 마주한 것만 같다. 그의 말과 그 아이의 바램이 절실히 가슴에 파고든다.

이 거리가 잃어버린 것은 결코 푸른 하늘만이 아니다. 석양 또한 그 중 하나다. 나의 선택, 그로 인한 영향이란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그 무엇이다. 어른들처럼 눈을 돌리고 모르는 척 살아왔던 건, 그건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였던 건 아닐까.

「저기. 히나는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히나도 실은, 이 비가 그치길, 바래?」

문득 말을 꺼내고는, 언덕길에 그저 멈춰서고 말았다. 우산을 쓴 채 걸어가는 히나의 뒷모습. 조금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는 날 뒤돌아보았다.

「──호다카는, 후회하고 있어? 푸른 하늘을 잃어버렸던 걸. 이 세상을, 바꿔버렸던 걸.」

돌아본 네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난 망설임을 벗어던지듯 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였다.

「난, 그 때 이 세상 대신 히나를 선택했던 것만큼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이 세상에 널 데리고 오고 싶었으니까.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맑아지더라도, 거기에 네가 없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푸른 하늘 아래 있어도 내 마음이 맑아질 일은 결코 없어. 네가 없는 세상따윈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하지만──」

그로부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 난, 견딜 수 없는 무게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푸른 하늘과 맞바꿔 구해냈던 것이다. 그만큼, 푸른 하늘보다도 히나가 좋다고 또렷이 생각했다. 앞으로 푸른 하늘을 못 보게 되더라도 괜찮다고, 푸른 하늘뿐만이 아닌, 어떤 것과 맞바꿔서라도 히나만 있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런 각오를 품고 나는 히나를 선택했다. 그런데도 이제와서 누군가를 위해 맑은 날씨를 바란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어처구니없는 소망이겠지만.

뺨에 희미하게 남은,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는 흉터가 문득 쓰라려왔다.

 

「……저기 호다카. 나 말야, 네가 태어나서 자란 곳에 가보고 싶어.」

어느새 내게 돌아온 히나가 또렷이 날 마주보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 엄마를 보러 왔으니까. 다음엔 호다카 차례야. 네가 어떤 곳에서 태어나서 어떤 곳에서 자랐는지 직접 가보고 싶어.」

히나의 눈동자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엔 언젠가 내가 그 섬에서 쫒아갔던 빛무리처럼, 눈부신 빛이 담겨 있었다.

 

* * *

 

둔중히 울려퍼지는 뱃고동 소리에 문득 뒤돌아보았다. 길다란 부둣가로부터 하얀 궤적을 남기며 오후에 단 1회 운행하는 여객선이 출항하고 있다. 수평선 너머로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린 섬 전망대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꽤 높은 곳까지 올라왔네.」

우산을 펼친 채 곁에서 걷고 있던 히나가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춰섰다. 가랑비가 내리는 하늘 아래, 산기슭에 여기저기 자리잡은 촌락들이 안개 속에 숨어 드문드문 비친다.

「히나, 힘들진 않아? 괜찮아?」

익숙치 않을 급경사가 신경쓰여 물어보자, 그녀는 이 정도는 괜찮다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르막 내리막을 거치며 오솔길을 지나며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잡은 전망대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가드레일 바로 아래엔 바다가, 반대편엔 우거진 풀숲이 어디까지고 펼쳐져 있다.

「저기, 호다카는 부모님 앞에선 되게 딱딱하더라. 나랑 나기랑 얘기할 때랑은 완전 다르던걸.」

이곳에 오기 전 그녀를 데리고 잠시 본가에 들렀다. 내가 그랬나 잠시 떠올리고 있자니 옆에서 걷고 있던 히나가 날 손으로 쿡쿡 찔러왔다.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부끄러움도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아깐 확실히 부모님 앞에서 퉁명스러운 태도였던지도 모르겠다.

「어, 그렇게 달라보였나…… 그래도 예전보단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어느정도 얘기도 나누게 됐으니까. 가출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

숨막힐 듯 비좁은 이 작은 섬에서 탈출하여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곳까지 가보고 싶다. 반짝이는 도시의 그 눈부신 불빛 속으로 향하고 싶다. 그런 생각에 충동적으로 가출했던 그 시절, 그 때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부모님과의 사이도 어색하게 뒤틀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때 이후 서서히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너 그때 가출소년이었지 참. ──그래도 좋겠다. 난 부모님이 계신 것만으로도 부러워.」

히나가 무언가 떠올리듯 문득 중얼거렸다.

아스팔트 도로에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엔 칙칙한 잿빛 보도블럭이 깔려 있어, 군데군데 생긴 빈틈을 메우듯 잡초가 무성하다.

간신히 전망대에 도착해, 우린 둥그런 철제 난간 앞에 멈춰섰다. 수평선에 녹아들듯 잿빛 구름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비탈길 위로 축축한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리는 무수한 접풀들이 펼쳐져 있다. 먹구름 낀 하늘 아래 눈앞은 먹먹하여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도 여기 자주 왔었어. 어렸을 땐 이 전망대에서 도쿄는 어느 쪽일까 항상 찾고 있었어. 맑은 날에는 여기서도 잘 보이거든. 부둣가도, 마을도, 하얀 파도도, 산기슭의 햇살도. 하지만 지금은──」

이젠 더 이상 맑아질 일 없는 이 세상을 곱씹으며 다시금 씁쓸해진 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히나가 내 옆에 다가섰다.

「저기 호다카, 여기도 그렇게 안 좋은 세상은 아냐. ……난 좋아해. 우린 분명 세상의 형태를 바꿔버렸지만, 그치만 바뀌어버린 이 세상도 실은 조금은 아름답잖아. 항상 비가 내리고 있지만 계절은 흐르고 있잖아, 멈추지 않고.」

가령 두터운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줄기. 빗방울을 머금은 꽃망울.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라나는 풀숲들.

예전보다도 더욱 짙어진 녹음 가득한 언덕길.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비치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비닐우산 너머로 반짝이는 빗소리. 젖은 공기를 씻어내듯 반들거리는 불빛들. 빗소리에 내려앉듯 차분한 거리들.

이 세상을 비추는 그런 모습들도 분명 무척 아름다운 모습들이라며, 히나는 하나하나 손에 꼽으며 떠올리듯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했던 수국화도 예전보다 오랫동안 볼 수 있게 됐어. 바다가 되어버린 곳도 있지만, 수몰된 전철 대신 수상 버스도 다니게 됐어. 그곳이 어떤 세상이라도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적응해서 힘차게 살아가고 있어. 어떤 세상일지라도, 여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이잖아. 호다카, 그때 우린 세상을 망쳐버린 게 아냐, 세상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을 뿐이야. 그 존재방식을 조금 바꾸어 놓았을 뿐이야. ──그리고 난 말야, 널 만난 뒤로 이 세상을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할 수 있게 됐어. 예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됐어.」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발밑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던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난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도 그저 고독할 뿐인 그 하늘을 알고 있어. 반대로 날 품어주는 따뜻하고 상냥한 비도 알고 있어. 그저 홀로 쓸쓸할 뿐인 맑은 하늘보다, 난 호다카와 함께 살아가는 빗속이 좋아.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말했었지, 나도, 푸른 하늘보다 호다카가 좋다고. ……이제 두 번 다시 맑아지지 않아도, 나도, 호다카가 있는 이 세상이 더 좋아.」

히나가 날 바라보았다. 들고 있던 우산이 지면에 떨어진다.

「그 때 네가 그래줘서 다행이라고, 그래도 괜찮았던 거라고, 이 세상이 그걸 부정해도 나만은 절대 부정 안해. 혹시 네가 그걸 부정해도, 나만은 네 선택이 옳았다고 앞으로도 믿을거야. 네 선택을, 네 존재를 언제까지나 믿을거니까, 앞으로도 난 네 곁에 있을거야.」

「히나.」

어느덧 안개비가 된 빗줄기가 우산을 내려놓은 그녀의 뺨과 머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나도 우산을 내려놓았다. 마치 비마저 울고 있는 것처럼, 고요한 안개비에 녹아들듯 서서히 젖어간다.

「나도 함께 책임질 테니까, 호다카 혼자서 다 끌어안지 말아줘. 혹시 죄악감 때문에 네가 슬퍼한다면, 모처럼 함께 살 수 있게 됐는데 네가 책임을 끌어안고 살아가게 된다면, 괜찮을 거라고, 나만은 널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난 네 괜찮음이 되고 싶어. 네가 돌아올 장소가 되고 싶어. 그게 앞으로 살아갈 나의 꿈 ──나의 가장 소중한 바램이야.」

 

우린 그 때 그렇게 선택해서 다행이라고, 마치 구원받은 듯 또렷이 확신했다.

혼자서는 버텨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책임이니까, 둘이 서로의 책임을 절반씩 나누어 들자.

네가 괜찮을거라 말해줬기에 처음으로 생겨난 꿈이야.

괜찮음. 나 자신이 아닌, 너를 위한 한 마디. 네게 있어 언젠가 반드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너의 괜찮음이 되고 싶어, 나는 그 때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고 있었다.

 

「난 호다카를 위해 기도할거야. 그러니까 부탁할게, 호다카도, 이번엔 자신을 위해 기도해줘.」

히나가 살며시 눈을 감으며 손을 모아 기도했다. 나는 그녀의 곁에서, 그 손을 감싸듯 내 손으로 감싸쥐었다.

우린 그치지 않는 빗속에서,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위해, 두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히나.」

살짝 눈을 뜨며 그 이름을 부르자, 히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나와, 결혼해줘.」

마치 그러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히나는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우린 아직 학생이고, 아직 알바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분명 널 기다리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난 히나 말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내겐 너뿐이니까.」

손을 맞잡은 채, 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살며시 웃어보였다.

「응. 고마워. 나, 호다카가 없는 곳에서 3년간,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걸. 그러니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나도, 너뿐이니까.」

네가 웃는 걸 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것만 같아. 예전부터 쭉 그렇게 생각했어.

두터운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역시 넌 언제나 나의 빛이야.

내가 찾아헤메던 단 하나의 빛무리. 그 안에 네가 있었어. 앞으로도 나는 평생 그곳에 머물고 싶다.

 

「──아, 봐봐 호다카!」

문득 목소리를 높인 히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드넓게 펼쳐진 풀숲 위, 구름 사이로 햇살이 줄기줄기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이 오고가며 찰나 만들어 낸 기적처럼. 앞으로의 미래를 비추는 한 줄기 희망처럼. 구름 드리운 하늘 아래에서밖에 볼 수 없는, 넋을 잃어버릴 만큼 신비하면서도 웅장한 풍경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녀와 함께 그저 조용히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럼에도 아름다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꾸어놓은 세상이지만, 그 세상을 사랑해도 괜찮다고 그녀가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혼자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그 어떤 미래라 할지라도, 네가 함께 있어준다면, 괜찮을 거라고 말해준다면, 바다에 잠긴 이 세상을 난 분명 좋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세상이 바뀌어도, 비가 그치지 않아도, 지금까지처럼 계절은 흘러흘러 이어진다.

몇 번이고 다시 맞이한 어느 여름날.

삼각 지붕의 새하얀 예배당에서, 축복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양옆의 의자엔 푸른 리본에 묶인 꽃들이 우릴 반긴다. 우린 한가운데에 놓인 레드 카펫을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나란히 걸어간다.

우릴 지켜보는 하객들 사이로 걸어간다. 말쑥한 회색 정장을 입고 온 스가 씨가 실눈을 뜬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와인 레드빛 드레스를 맞춰 입은 나츠미 씨가 기쁜 듯 윙크해보인다.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나기 선배의 곁을 지나, 우린 단상에서 우릴 기다리는 신부님 앞으로 걸어간다.

결코 많은 사람이 와주신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건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우리 이외에도 있다는 것.

우리가 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기에, 우리는 이곳에서 반드시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히나를 선택해서 다행이야. 그 무엇과 바꾸더라도, 그 날 그녀를 선택해서 다행이야.

단상에 도착하고, 우린 서로를 마주보며 맹세를 나누었다. 아플 때도, 건강할 때도, 여유로울 때도, 가난할 때도, 언제나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아껴줄 것을.

그리고 다시금 맹세했다.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것을.

새하얀 꽃과 함께 히나가 살며시 몸을 기울였다. 나는 그녀를 안으며 순백의 베일을 살짝 들어올렸다.

맹세의 키스를 나누고, 다시금 그녀를 보았다. 홍조를 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바라보고는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크리스탈 너머의 정원엔 가만히 비에 젖은 수국화가 피어있었다.

히나의 어머님이 좋아하셨던 꽃. 비를 의미하는, 석양을 의미하는, 그리고 화목한 가정을 상징하는 그 꽃.

순간 밖에서 새어 들어온 햇살을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지만. 비는 묵묵히 내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줄곧 구름으로 뒤덮여 있던 하늘이 아주 잠깐 맑아졌다.

여우비였다.²⁾

가만히 비추었던 햇살을 보곤 예배당의 모든 사람들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우리가 바꾸어놓은 이 세상조차도, 이렇게 맞이하게 된 지금을 축복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각주

¹⁾ 아카네(茜). 꼭두서니. 붉은 빛을 내는 염료로 사용되는 식물. 해질녘을 뜻하는 관용어구 茜さす로도 쓰인다.

²⁾ 원문은 お天気雨.

 

 

 

 

 

 

 

- 지난편에서 원작자에게 번역, 전달된 댓글 및 감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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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편에서 원작자에게 번역, 전달된 댓글 및 감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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