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널 어떻게 잊어
그녀의 사진을 지웠다.
출근길과 퇴근길을 바꾸었다.
그녀가 싸준 도시락통을 버렸다.
그녀와 데이트할 때 입었던 옷을 버렸다.
하지만 역시 자꾸만 떠올라버린다. 김이 서린 거울마냥 뿌옇게 떠오른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낭패감이 마음을 쥐어잡는다.
이 방에서 그녀와 나눈 전화와 대화와 그 모든 것들이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래, 너도 이제 나이가 나이니까 말이다. 밥 잘 먹고 다녀라.」
「응, 가끔 찾아올게.」
나는 자취방을 잡고 이사를 하였다.
「정말 괜찮은건가? 안색이 안 좋은데.」
「걱정마세요. 문제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겠네만은... 저번주 출장 이후에 썩 안색이 안 좋구만. 무슨 일 있었던건가?」
「별 일 아닙니다.」
출장을 다녀와서 며칠 뒤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에 가지 않게 되었다. 연락처도 삭제했다.
이게 그녀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그런 건 위선이다.
그저 그녀를 상처입힘으로 인해 내가 상처입는 것이 싫어졌다. 단지 그뿐이다.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만 사무실에 요란하다. 일에 집중한다. 오래된 습관이다.
어서 거울에 김이 서렸으면 한다. 좀 더 뿌옇게 되어,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되어선,
막연한 기대감만 갖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어이 타키, 나 좀 보자.」
「......무슨 일인데.」
이녀석들 번호를 안 지웠었군. 테시가와라인 모양이다.
「됐고, 7시에 카페에서 보자. ...아니, 내가 회사로 찾아가마. 괜찮겠지.」
「......」
「괜찮은걸로 생각하지. 나중에 보자.」
번거롭게 됐군. 앞머리를 감싸쥔다.
「네녀석, 어찌된거냐.」
「뭐가.」
「왜 미츠하와 만나지 않는거냐.」
「보고 왔어?」
「말 돌리지 마라. 화나려고 하니까.」
「...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잖아.」
「이 자식이...」
빌딩 앞에서 주먹을 쥐며 부들부들 떠는 테시가와라와, 귀찮은 듯한 타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유나 좀 들어보자. 대체 왜냐?」
「...그녀에게 물어봐.」
「전부 미츠하 잘못이라는거냐 네녀석은.」
느닷없이 멱살을 잡혔다. 귀찮네 정말. 테시가와라의 얼굴로 주먹을 날린다.
「......!」
「애초에 네 여자친구도 아니잖아. 왜 이렇게 신경쓰는거냐. 이쪽은 이쪽대로 사정이 있다고.」
「후... 그 사정이 뭔데?」
「그 아이는, 나랑은 이어지지 않는 편이 나아. 서로 상처입게 될 테니까.」
「...하하, 그게 이유냐?」
길바닥에 형편없이 나뒹군 테시가와라가 손을 이마에 얹더니 웃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너 바보냐?」
「......」
「사람은 말야, 원래 서로 상처입히는 존재다 이 병신같은 놈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지. 넌 겨우 그따위 이유로...」
「훈계는 듣고 싶지 않은데. 이만 좀 가주지 그래. 일이 바빠서 말야.」
「......후. 그래, 가주마.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라. 미츠하는 슬퍼하고 있다는 걸 말야.」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그래서 내가 그녀를 안 만나는거라니까.
아, 연락처도 삭제해줬으면 좋겠네. 그럼.」
사정도 모르면서 가르치려 들다니, 진심으로 불쾌하다.
나라고 그런걸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떨어져있으면 금세 서로를 잊어버리고 만다.
잊어버리고 떠올리기를 되풀이한다. 고작 3일간 못 본것만으로도 그렇게나 힘들었다.
만약 한참 동안 떨어져있게 된다면? 내가 무언가의 사고로 죽어버린다면?
남겨진 그녀에게 그건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영원히 떠오르지 않는 누군가를 그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로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편이 낫다.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투덜거리며 회사로 돌아갔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피곤하면 피곤할수록 잠도 잘 올테니까.
어느덧 6월이다. 후덥지근한 도쿄의 밤, 야근이 계속된다.
실은 야근하지 않아도 문제없지만, 일을 자처했다. 일에 집중하면 잊어버릴 수 있다.
마시려고 타둔 커피는 마우스패드 옆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미친듯이 모니터만 쳐다본다.
이제 밤10시쯤 되었을까... 시계를 쳐다보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어이, 타키.」
「뭐냐. 타카기냐.」
「츠카사도 같이 있어. 잠깐 시간되냐?」
「...뭐 상관없는데.」
「그래? 그럼 얼른 회사 밖으로 좀 나와봐라. 이미 밑에 있으니까 말야.」
이녀석들, 이 늦은 시각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가.
오랜만에 희미하게 웃으며, 가방을 챙기고 회사 문을 나섰다.
「그래, 무슨 일인데? 츠카사는 또 왜 저모양이고?」
「아 이녀석 한 잔 해서 말야. 뭐 이해해줘라.」
「뭐 이자식아. 나 안 취했어......」
사랑싸움인 모양이군. 아니, 싸웠다기보단 자기 혼자 괜히 한 잔 해버린 모양이다.
「너같은 놈한테 오쿠데라 선배는 과분하다 정말...... 잘해드리고 있는거 맞냐?」
「닥쳐 임마... 니가 뭘 안다고...」
「저녀석 엉망인데. 적당히 아무데나 버리고 가면 안되냐?」
「어, 그럴까?」
오랜만에 친구들과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하니,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
사실 요 며칠 감정을 억누르고 억지로 과로했더니 지나친 피로에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 요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하나 생겨서 말야. 근데 이게 밤에는 살롱으로 영업하는데, 조명배치가 꽤 독특하단 말이지.
딱 지금쯤 가면 괜찮거든. 가서 위스키나 한 잔 하면서 가게구경이나 하자고 해서 불렀지.」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요 근처라면 마시고 나서 집에 가기에도 문제가 없을테니.
「그렇군. 어느쪽인데?」
「아, 이쪽이야. 임마 츠카사, 정신차려라. 부축하기 힘들잖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거 완전히 안 되겠는데.」
평상시와는 다른 길로 어딘가로 걸어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평상시대로이긴 하다.
그녀를 만나던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걸어다니던 길이다. 이것저것 떠올라버려 불편하다.
이것 때문에 일부러 출퇴근길을 바꿨던 것인데. 하지만 친구들에겐 내색할 수 없다.
「야, 다 와 가니까 조금만 참아라.」
「참긴 뭘 참아...... 똑바로 내 다리로 걷고 있다고......」
「업혀가는 놈이 헛소리는...」
돌아보니 그녀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도저히 어떻게 해버릴 수 없는 흔적들.
문득 불도저로 이 길을 밀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저기야. 위에 간판 보이지?」
타카기의 손길을 따라 위를 바라본다. 계단 위에 입간판이 서있다. 저기인 모양이다.
「......!」
길을 잘못 들었다.
여긴 그녀와 처음 재회했던 장소다. 자괴감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재회한 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두 달 간의 기억에 휩쓸려간다.
「어이, 왜 그래? 너까지 취했냐?」
무릎을 후덜거리며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도 소용없는 모양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떠올려버린다. 옆에 아무도 없다. 또 힘든 하루의 시작이다.
「미안하다.」
말하며 나는 뛰어갔다. 지하철역으로 최대한 빨리 뛰어갔다. 그녀의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아직 막차는 끊기지 않았을 것이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한참을 망설이다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 딩동. 딩동.
반응이 없다. 지금 집에 없을 리는 없는데.
다시 초인종을 누르려던 타키의 눈이, 램프에 비춰진 초인종 위를 바라보았다.
원래 있었어야 할 집주인의 이름이, 없다.
그렇구나. 그녀도 이미 이사를 갔구나.
「하하하......」
연락처도 지웠고, 사진도 지웠고, 테시가와라나 사야카의 연락처도 지웠다.
우리는 다시 도쿄에 남겨진 1300만 분의 1이 되었다.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기적처럼 일어난 재회를 내 발로 걷어차버린 것일까.
아니다. 이 편이 낫다. 잠깐 욱해서 찾아오긴 했지만, 차라리 만나지 못한 편이 다행이다.
「......」
하지만 가슴 속에 몰아치는 회한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대로 망부석처럼 굳어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또 휴대폰이 울린다.
「...뭐지, 메일인가.」
자정에 메일이라니 별일이군. 뭐 늦게까지 야근한 협력업체의 메일쯤 되겠지.
탭하여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오늘로 두 달째다. 잊지 않았겠지 네녀석! 여기 미츠하의 완전 귀여운 사진이다! 보고 흐뭇해하라고!』
『귀, 귀여운 사진이라니... 그런거 아니니까. 응. 아무튼 이쪽은 타키의 자는 얼굴 사진이야. 귀엽지?』
얼빠진 표정으로 자고 있는 내 사진과, 웃는 그녀의 사진이다. 1달 전에 예약전송된 메일이다. 우린 이런 유치한 짓도 하고 있었던건가.
「......」
하지만 그 유치한 짓 덕분에 그녀의 사진을 손에 넣었다. 그래, 이렇게 생겼었지.
어떻게 봐도 내 머릿속 이상형을 끄집어낸 모습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아직도 사진찍는 법에 서툴러선 부끄러워하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발걸음을 옮겼다.
밤새도록 걸었다. 재회한 그 계단을 향해.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약간 후덥지근한 도쿄의 6월에 온몸이 땀에 절어 야근의 피로에 겹쳐진다.
아랑곳않고 걷다 보니 어느덧 10km를 넘게 걸어, 겨우겨우 그 계단에 도착했다. 이미 동이 틀 무렵이다.
「......하하, 있을 리가 없지.」
애초에 그녀를 만나길 기대하며 온 것도 아니다.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어떻게 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사진으로 어떻게든 찾아봐야할까. 생각하며 계단을 올려다보니―
아까 타카기가 가리키던 입간판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다.
「......」
계단을 걸어올라간다. 올라가면서 확신한다. 아마도 그녀가 있다. 왠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미츠하가, 입간판 뒤에 쪼그린 채 숨어서는 벌벌 떨고 있었다.
「......안녕, 타키.」
「안녕...」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나... 나 이사했다? 타키가 사준 옷도 버렸어. 출근길도 바꿔봤고, 타키의 사진도 지우고...
근데...... 무리야...... 미안해......」
「......」
미츠하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나 또한 망연자실해서,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잊을 수가 없었어...... 메일이 와선, 타키가 자는 얼굴을 봐버려서...... 미안해......
이제 갈 테니까.」
「......가지 마.」
미츠하의 손을, 간신히 쥐었다. 벌벌 떨면서 손을 쥐었다.
「나도 이사했어. 네가 준 도시락통도 버렸고, 출근길도 바꿨고, 사진도 다 지웠어.
하지만 여전히 네 기억이 너무 많이 남아있더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기억들이.
어제 텟시를 때려버렸어. 녀석이 그러더라. 사람은 서로 상처입히는 존재라고 말야.」
「......」
「미안하지만, 난 널 잊을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해. 너와 함께 있으면 널 상처입히고 만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함께 있고 싶다.」
「......바보네, 타키는.」
그리고 나도. 라며 미츠하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새벽녘, 아무도 없는 계단에서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울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에 해가 떠오르며 평소대로의 하루를 알린다.
「정~말 바보 커플이네.」
「네?」
오쿠데라 선배네와의 더블 데이트. 츠카사는 과음한 죄로 오쿠데라 선배에게 얻어터진 모양으로, 뺨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
「원래 기억이란 건 분명하지 않은거잖아? 나도 가끔 츠카사 얼굴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고.」
「서, 선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애원하는 츠카사의 눈빛을 마주보며 말 끊지 말라고 압박하는 듯한 선배. 우와, 무섭구만.
「하지만 그래서 사진이란게 있잖아? 츠카사 사진을 보면 또렷하니까 말야. 어제의 츠카사도, 오늘의 츠카사도.」
「서, 선배... 절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감격하는 츠카사의 눈빛을 마주보며 또다시 말 끊지 말라고 압박하는 선배.
「뭐 너넨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어쨌든 함께 있으면 생각나는거 아냐? 그건 맞지?」
「네...... 뭐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실 문제는...」
「아, 남일이라고 너무 간단하게 얘기한거라면 미안해. 하지만 고작 그런 문제로 만나지 않는건 너무하잖아? 지금은 어때?」
「네?」
「미야미즈 씨가 잠시 나갔잖아. 벌써 얼굴이 흐릿해?」
「아뇨 아직은...... 하지만 길어지면 흐릿해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기억은 흐릿해도 미야미즈 씨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잖아? 그럼 괜찮은거 아냐?」
「......」
미츠하는 갑자기 호출을 받고 회사에 갔다. 미안하다며 몇 번이나 사과하며, 약간 눈물마저 글썽이며 뛰어나갔다.
아직 우린 그런 관계다. 잠깐이라도 떨어져있으면 불안하다.
「일전에 헤어져있을 때엔 어땠어? 그립지 않았어?」
「그야 그립긴 했지만...... 하지만 미츠하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고......」
「이름같은게 뭐가 중요해.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만 생각나면 되는거 아냐?
미야미즈 씨를 좀 믿어봐. 너도 미야미즈 씨를 항상 기다리잖아?」
「......」
미츠하는 왕복 40분 거리의 회사를 1시간도 걸리지 않아 다녀왔다. 가쁜 숨을 내쉬며 내게 뛰어들었다.
「어이쿠. 어서 와.」
「타키...!!」
기막혀하는 오쿠데라 선배와, 부러운 듯한 츠카사.
「카페에서 뭐하는거야... 바보 커플 같으니.」
「서, 선배... 저도 저렇게 안아주시면 안될까요...」
기어코 오쿠데라 선배에게 얻어맞는 츠카사. 좋은 공처가가 될 것 같구만. 아니 좀 다른가.
「아무튼 이제 슬슬 가볼까. 다음에 봐. 미야미즈 씨도.」
「네. 다음에 뵙죠.」
카페에서 걸어나간다. 미츠하와 손을 꼭 맞잡은 채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전철로 걸어가는 밤길. 낮엔 후덥지근한 만큼이나, 도쿄의 6월밤은 서늘하다. 스미다 강을 보니 한결 시원해보인다.
「무슨 생각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미츠하. 팔짱을 끼곤 딱 달라붙은 채다.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나는 대답한다.
「......사랑해.」
「엣?」
어색한 침묵. 잠시 후에 미츠하가 얼굴을 붉히며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나... 나도 사랑해. 날 잊지 말아줘.」
「나도 널 잊지 않을거야. 노력해볼게.」
「뭐? 나 진지해. 불안하단 말야.」
울 것 같은 표정의 미츠하. 하지만 난 지금 놀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냐. 나도 진심이야. 정말 노력할거야.」
「그... 그렇구나. 에헤헤. 화내서 미안해.」
노력해야지. 진심으로.
「집에 가면 뭐할까?」
「헤헤. 타키 손 잡고 자고 싶어.」
「응. 나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네가 옆에 있는게 좋아.」
「...응.」
둘 다 얼굴을 붉히며, 조금쯤은 눈물을 머금 채 스미다 강변을 걷는다.
「있지. 선배가 그런 얘길 하시더라.」
「응?」
고개를 기대어오는 미츠하를 보며 말을 이어나간다.
「자기도 츠카사 얼굴을 가끔 까먹는대.」
「헤에, 정말?」
「뭐, 우리랑은 달리 그냥 건망증이겠지만. 그래서 사진을 들고 다닌다나봐.」
「헤에, 그렇구나......」
「있지, 미츠하. 우리도 사진 많이 찍자. 데이트도 많이 하고, 함께 이것저것 잔뜩 하자.」
이 세상에 우리가 사랑했던 흔적을 잔뜩 남기자.
「응...... 알겠어. 헤헤, 근데 그것만 할거야?」
한껏 행복해보이는 미츠하. 역시 나보다 강한걸까.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나와 함께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있는 얼굴이다. 불안감을 숨기고 있는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힘겹게 입을 연다. 조급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내 진심이다.
「아니....... 결혼하자. 내 아내가 되어줘. 부탁할게.」
「......흥, 반지는 없는거야?」
라면서도 미츠하는 우두커니 선 채 또 울고 있다.
「이제 여기도 기억나겠네.」
「...응?」
「그게 말야. 일전의 계단처럼 말야. 이제 여길 지나다닐 때마다 떠올려버릴거잖아.」
「어떡해, 나 출근할 때마다 여기 지나가는데.」
「그... 그렇구나. 미안해.」
「아냐. 매번 꼭 떠올릴거야. 헤헤.」
미소짓는 미츠하. 눈물이 날 것 같다.
「사랑한다고 해줬어. 결혼해달라고 해줬어. 타키가 누군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아도, 그건 분명 떠오를거야.
그러니까 저도 말할게요. 나 타키의 아이를 갖고 싶어.
결혼하자. 제 남편이 되어주세요.」
「...응. 기꺼이.」
도쿄만으로 흘러드는 스미다 강의 물줄기에, 초여름의 별밤이 비친다. 결국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잊을 수 없어서, 다시 미츠하를 찾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분명한 것은, 다시는 이 손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