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팬픽/동방Project / / 2023. 3. 18. 14:21

In the chaos

 

태초에 따분함이 있었다.

 

저녁노을 비치는 교실은 방금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그저 적막으로 고요하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다음을 기약하던 졸업생들의 모습은 이제 없다. 아직은 쌀쌀한 3월 샛바람이 창문 너머 커튼에 나부끼며 귀밑을 스친다. 우두커니 홀로 남은 우사미 스미레코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색다른 학교의 모습에서 애써 이질적인 무언가를 찾으면서도 못내 따분해하고 있었다.

「……갈까.」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교내 이곳저곳을 찍어본다. 아무도 없는 교실, 아무도 없는 복도, 아무도 없는 계단, 아무도 없는 운동장. 친구들과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다음에 꼭 만나자는 말은 애시당초 다음에 볼 계획이 없을 때나 하는 말이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정도는 다들 알고 있다. 내년 이맘때즈음 그 얘기를 꺼냈다간 아직도 중학생 티를 못 벗었냐는 소리나 들을게 뻔하다.

그런데도 사진을 찍고 있는 이유. 추억으로 남기고자 하는 그런 마음은 아니다. 이런다고 돈이 드는 건 아니니까.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아무도 없는 교실이 새로우니까. 새로운 것은 재미있다. 하지만 재미에는 신선도가 있다. 촬영할 때 잠시 뿐, 금세 따분함이 밀려온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졸업식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년 뒤 고등학교 졸업식도 별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4월이 되면 고등학교를 다니게 될 것이고, 해뜨면 등교하고 별뜨면 하교하고 수업시간에 수업을 듣고……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누군가가 짜맞춘 시간표에 따라 흘러갈 인생. 그녀는 그것이 못내 따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3년간 똑같았던 하교길을 걷는다. 길가엔 벚꽃이 이제 막 피어나려 하고 있다. 몇몇 학생들이 무언가 사연이 있는듯 벚꽃 아래 멈추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우사미 스미레코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벚꽃 너머 하늘은 희뿌옇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닌 3년 내내 그래왔던 하늘이다. 아무 일 없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 그녀는 귀가를 서둘렀다. 문득 이곳을 걷고 있는 것이 끔찍한 시간낭비로 느껴졌던 탓이다. 집에 돌아간들 새삼 새로운 일이 있지는 않겠지만, 어떻든 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다. 나아가는 속도 정도는 스스로 정하고 싶다. 내일, 모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표를 생각하며 그녀는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차라리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덜 지루할 것을.

 

 

* * *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그랬다. 나름대로 새로웠던 것은 잠시 며칠 뿐.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으레 그렇듯 다음 학기 교과서를 받게 된다. 달리 할 일도 없기에 그걸 읽어본다. 그렇게 많은 분량도 아닌 탓에 며칠 남짓이면 읽을거리는 떨어지고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다음 학기 수업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한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선생들은 출석번호를 호명하고 몇 페이지인가를 읽으라고 지시한다. 학생들은 그걸 읽는다. 이미 다 읽은 내용을 구태여 또 듣게 된다. 교과서를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가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시험 역시 교과서에서 출제된다. 괜찮은 성적을 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것이 노력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애시당초 어째서 이런 일련의 행위가 난이도를 지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들 어려움을 겪고 있다. 때문에 그녀 스스로가 타인과는 다르다는 자각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9년간, 그녀에게 그 시간은 그저 지겨운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앞으로 3년이 더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과연 앞으로 3년만일까. 어른이 된다고 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을까. 어쩌면, 실은 새로운 것은 이미 있으며 내가 그걸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인건 아닐까.

때문에 그녀는 새로운 지식에 천착했다. 책, 더욱 많은 책. 책은 좋다. 시간을 압축적으로 쓸 수 있으니까. 천체물리학 서적을 읽으면 우주에 직접 나가보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지식을 알 수 있고, 추리소설을 읽으면 탐정사무소를 직접 차리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탐정의 삶을 체험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간접경험에 불과하지만, 다행히도 이 세상에 축적된 책이라는 형태의 지식은 어린 그녀가 지루함을 떨쳐내기엔 그럭저럭 많은 양이었다. 그런 그녀가 다다르게 된 지점이 아직까지 탐사할 곳이 남은 자연과학, 그리고 오컬트였던 것 역시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 * *

 

 

「그래서 이번엔, 토지라도 매입할 생각인가? 미안하지만 우린 땅을 사고팔진 않는데.」

「아, 뭐 그런 건 아니고.」

환상향 속 어딘지 모를 야산, 우사미 스미레코는 측량기를 들고 넓다란 바위에 걸터서 있었다. 시선은 먼 곳. 두 눈은 반짝이며 따분함과는 인연이 없다는 듯 내내 즐거운 표정이다. 건너편 나무 위엔 졸린 듯 눈을 비벼가면서도 꿋꿋이 우산을 들고 앉아있는 야쿠모 유카리. 저녁노을 비치는 산 정상은 퍽 아름답다. 무슨 일인가 싶어 먼발치에서 기웃거리는 온갖 새들부터 심지어 텐구까지 한적한 야산은 때아닌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의 반지름이 궁금해서 말야.」

「그건 왜 알려고 하지?」

「……아, 뭐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가.」

「자기 처지는 잘 알고 있네. 넌 환상향의 결계를 부수려 했으니 말이지. 솔직히 귀찮으니까 얌전히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들은 척 만 척, 한동안 그녀는 크랭크를 돌리며 여기저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산속에선 해가 빠르게 저문다. 이윽고 지평선에 땅거미가 내리고, 한편으론 어차피 여기서 들여다본들 곧바로 반지름을 알아내기에도 무리가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문득 측량기를 내려놓고는 뒤돌아보았다. 경계의 요괴는 나무 위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환상향, 그리고 환상향의 결계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말야.」

「……?」

「공간적으로는 일본의 시나노. 하지만 시간축은 내가 사는 현대와 다르지. 얼핏 생각해보면 그냥 평행세계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런데 난 여길 오가고 있잖아? 마찬가지로 너도 가끔 현대에서 이것저것 들여오는 것 같고.」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실은 두 세계는 교류가 가능한게 아닐까? 너나 나처럼 특수한 케이스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에서 말야.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호킹 복사가 떠올랐어.」

「여긴 블랙홀이 아닌데?」

「일단 들어봐.」

문득 우사미 스미레코가 수첩을 꺼냈다. 대충 펜으로 휘갈겨 그린 도식은 블랙홀의 경계인 사건의 지평선, 그리고 양자 요동 현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원래 사건의 지평선이란 블랙홀의 중력이 빛의 탈출속도와 일치하는 지점이잖아. 한 마디로 블랙홀의 중력장에 한 번 휘말려들어간 물체는 두 번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지점부터가 바로 블랙홀이라 여겨졌지. 반대로 블랙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온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

「하지만 양자 요동 현상이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서 일어난다면? 전자와 양전자가 순간 생겨났는데, 원래는 쌍소멸했어야 했을 이 두 물체 중 하나가 블랙홀에 빨려들어가 버리면 나머지 하나는 쌍소멸할 파트너가 사라졌으니 그대로 남게 되지. 외부에서 보기엔 블랙홀에서 물질이 방출되는거나 다름없는 현상. 그걸 다루는 이론이 호킹 복사 이론이고, 실제로 얼마 전에 증명도 됐지.」

「그게 네가 보기엔 환상들이와 비슷해보인다는 얘기인가?」

「뭐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현상이 비슷해보이는건 사실이니까, 재미있잖아? 호킹 복사 이론에 따르면 블랙홀은 언젠가 증발하거든. 증발시간은 질량에 비례하고. 그런데 반지름만 알아내면 질량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공식으로 유도해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환상향의 반지름이 궁금해졌다는 그런 얘기.」

「아― 귀찮아.」

느닷없이 우사미 스미레코의 등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사뭇 권태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에 떠 있는 하쿠레이 레이무는 측량기를 흘깃 훑어보더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더욱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몸짓으로 대강 하늘에 의지해 반쯤 기댄 채로 입을 열었다.

「나랑은 별 상관 없는 이야기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 내가 사는 현대와 환상향 사이에 교류가능성이 있다면 나름대로 재미있지 않겠어?」

「별로 재미없는데…… 귀찮은 일만 늘어날 것 같고.」

「음…… 대강 1억 6500만년 정도 걸리겠네.」

「응? 뭐가?」

이제야 잠이 깬 건지, 보랏빛 지평선을 배경으로 이젠 음영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야쿠모 유카리가 말했다.

「네가 얘기하는 호킹 복사 이론이 환상향에 적용된다고 쳤을 때 환상향이 증발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 반지름은 대충 100km 정도로 가정하고. 네가 들고 있는 그 측량기, 미터법 쓰는 거 맞지?」

「어…… 뭐 일단은 그런데. 어떻게 계산했어?」

「일단은 산학算學이 특기니까.」

「암산한거냐……」

「뭐, 1억년? 역시 나랑 상관없잖아.」

「그보다 네가 환상향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할게 있지 않을까 싶은데.」

「……?」

이젠 숫제 누워서 툴툴거리는 무녀를 뒤로 하고 경계의 요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그 측량기는 어디서 난 거지? 네가 쓰는 초능력이겠지?」

「뭐 그렇지.」

「근데 넌 어떻게 초능력을 쓸 수 있지?」

「그야, 난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까.」

「하지만 네가 사는 곳에서도 그걸 쓸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닐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경계의 요괴가 문득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잔가지에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치솟아 퍼덕이며 날아오른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측량기를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곳에선 네가 믿는 것이 구현화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지. 너는 현대의 시각으로 환상향을 보고 있지만, 환상향은 환상향의 시각으로 너를 보기도 하거든. 네가 이곳의 반지름을 100km라고 생각하면 실제로 그럴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

「……?」

「인과관계가 반대라는 얘기야. 너는 어떤 현상을 가설을 통해 알아내고 싶은 거겠지만, 실은 네가 어떤 가설을 믿게 되면 그 결과 그게 사실이 되기도 하는게 환상향이지. 즉,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은 나로서는 귀찮은 일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

「언젠가 증발할지도 모르니까?」

「네 가설대로라면 꽤 오래 걸리겠지만. 하지만 넌 꽤 허술하니까 또 모를 일이지. 누가 그러던데? 사치문약하다고.」

「실례네.」

「아무튼 넌 여길 네멋대로 오가면서 나름대로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누굴 데리고 오고 싶다느니 그런 생각을 할 위인으로는 안 보이는데. 사실 너 별로 현대에 관심도 없잖아?」

「실례네.」

「그리고 말인데.」

크랭크를 돌려보던 경계의 요괴가 문득 뒤돌아보았다.

「네가 우사미 스미레코인지 아닌지, 넌 어떻게 확신하지?」

 

 

* * *

 

 

「…………」

창밖엔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암막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벌레소리에 우사미 스미레코는 잠에서 깼다. 한여름 무더위 탓인지 온통 땀범벅이다. 에어컨을 끄고 잤었나…… 얼른 켜야지…… 근데 마지막에 그건 뭐였지……

『자, 놓고 간 물건.』

에어컨을 찾아 침대맡을 더듬던 시선 끝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갑작스레 내동댕이쳐진 측량기가 삐걱이며 바닥을 굴러다니다 벽에 걸려 멈췄다.

「……」

잠시 굳은 사이에 경계는 사라지고 없었다. 매미소리와 측량기만 덩그러니 남겨진 방에서 그녀는 에어컨 키는 것도 잊은 채 땀에 젖어 한바탕 웃고 있었다.

 

 

* * *

 

 

「그래서, 아직도 그때 생각 하시는 거에요?」

「……글쎄. 여기 멕켈란 온더록으로 한잔.」

「아, 저도 같은 걸로 한잔 더 주세요.」

어두침침한 바. 노란 불빛 아래 우사미 스미레코는 금요일 저녁의 여흥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하는 광경이 예전엔 퍽 낯설었지만, 이제는 딱히 그렇지도 않은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는 방증일지도.

「뭐, 옛날 얘기야.」

「믿기 힘든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측량기는 선배네 집에서 저도 봤으니까 말이죠―」

「하하……」

동그란 얼음 속 금빛 찰랑이는 술이 유리잔에 담겨 넘실대고 있다. 다면체 얼음 너머 스스로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땐 정말 지루했거든. 그래서 그랬던건지도 모르지. 새로운 건 재밌잖아? 혹은, 불확실한 무언가에 대한 동경? 갈증? 뭐 그런거.」

「헤에……」

「매일 똑같은 시간에 등교하고 어차피 다 아는 수업을 듣고…… 그런게 재미없었거든. 쓸데없는 시간낭비잖아? 그래서 그땐 그런 경험들이 참 재밌었어. 그땐 어렸으니까 더 그렇게 마음껏 빠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홀짝이는 술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달다. 그때 그건 뭐였을까. 어른이 된 지금의 삶은 예전에 짐작했듯 재미없고 틀에 박힌 시간표처럼 흘러가는 그것이었지만, 한편으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한편으론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왜일까. 불확실한 무언가가 더 많아졌기 때문일까. 모든게 술과 함께 아롱다롱 흘러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환상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틀림없겠지만.

「아무튼 즐거웠어.」

문득 후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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