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SS 번역 / / 2023. 4. 23. 00:18

해피 리턴즈

※ 원작자분과의 협의 하에 게제하였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 이 작품은 Pixiv의 TMC님의「스즈메의 문단속」단편입니다.

(원작자 Pixiv 링크)

 

 

- 해피 리턴즈

「스즈메의 문단속」 웹 온리전 발행예정이었던, 소타스즈 앤솔로지에 기고했던 이야기입니다.

『4월에 피는 꽃의 꽃말』을 테마로 쓴 글입니다.

 

스즈메와 소타의 곁 꽃의 한 조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썼습니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을 문득 발견하듯, 이 이야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부디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해요.

 

혹시 마음에 드신다면 부디 작품에 대한 북마크, 코멘트를 부탁드립니다.

(역주 : 달아주신 댓글은 모두 번역하여 원작자께 전달드릴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피아빛 낡고 빛바랜 추억이, 때때로 날 따스하게 해줄 때가 있다.
아스라이 먼 옛날 마음에 새긴 풍경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비추어줄 때가 있다.
그래서 스쳐지나는 일상 속에서도 사람들은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려 하는건지도 모른다. 마음속 앨범에 살며시 끼워넣듯이.

옷장 속에서 두툼한 앨범을 꺼내 표지를 넘긴다. 이렇게 사진을 바라볼 때면 문득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 앨범은 도쿄로 이사올 때 한 권만 챙기고 온 것이다. 도저히 고를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진 가운데에서, 타마키 씨가 직접 골라준 사진들이다. 옆에서 바라보는 소타 씨와 함께 난 페이지를 넘겼다.

4살 이전의 사진은 더이상 갖고 있지 않다. 대지진으로 집과 함께 모두 휩쓸려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대신 타마키 씨가 날 데려와준 후 사진을 잔뜩 찍어주셨다.
무언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날 사진에 담아주셨다. 너무 사진을 잘 찍으시길래 난 타마키 씨가 사진찍는 걸 좋아하시는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와 함께 보내온 시간을 가능한 한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제와선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별일이 없어도, 그저 일상적인 그런 풍경도 많이 찍혀 있다.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평범한 나날들의 모습. 내가 토라져있던 모습도, 울던 모습도, 물론 미소짓던 모습도.
앨범 한켠마다 그런 모습이 가득하다. 이곳에 새겨져있는 건 수많은 추억들, 내가 살아온 시간과 발자취 그 자체.
죽는 건 두렵지 않다며 염세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시기도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보고 있으니 역시 감회가 새로워서, 돌이켜보면 행복한 추억 역시 잔뜩 있다.

북풍이 창틀을 살며시 두드린다. 대로변엔 낙엽수 가지 끄트머리가 앙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조금쯤 쓸쓸해진 창문 너머로 비치는 하늘은 우중충한 겨울빛을 띠고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점점 혹독해져가는 계절 속에 아직 봄의 발자국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리움에 이끌려 천천히 넘기던 앨범 속에서, 평범한 풍경들 중 한 장의 사진에 눈이 멎었다.
「스즈메, 이건 뭐지?」
옆에 있던 소타 씨도 같은 사진을 살펴본다. 그건 아직 어렸던 내가 타마키 씨에게 받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뭘 그린 거야? 이거, 노란 꽃인가?」
책상 위에 펼쳐진 커다란 도화지에는 어떤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린 난 노란 색연필을 들고 그 꽃잎을 칠하고 있었다.
「뭐였더라. 뭘 그렸던 건지는 나도 잘 기억 안 나는데.」
아직 너무 어렸던 탓에 무슨 꽃을 그렸던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지만 그렸던 사실 자체는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분명 난 어렸을 적에 자주 노란색 꽃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스즈메는 노란색을 좋아하는구나.」
도화자에 선명한 노란빛으로 칠한 스케치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듯 회상했다.
「응, 예전부터 그랬어. 날 이끌어주는 색깔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 케이스도 노란색이다. 어렸을 적에 가장 맘에 들어서 언제나 두르고 다녔던 머플러도 노란색이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생 시절 날 뒷문까지 데려다 준 치카의 오토바이도, 고베까지 데려다 준 루미 씨의 차도, 그리고 날 뒤에 태워준 타마키 씨의 자전거도 노란색이었다.
그뿐만이 아냐, 전파탑에 걸려있던 보름달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가장 소중했던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의자도.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날 이끌어주었던 건 전부 노란색이었어. 어느새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색.

―그런데, 어째서 난 노란색을 좋아하게 된걸까.
노란색이 날 이끌어준다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걸까.
오래된 사진 위, 도화지에 꽃을 그리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손끝으로 더듬어본다.
문득 노란 꽃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흐릿한 그 모습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듯 금세 흩어져버렸다.

「오늘은 어렸을 때 스즈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중얼거리는 소타 씨를 난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네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왔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그런 발자취를 알 수 있었던 것도 물론 좋았지만.」
가만히 앨범을 바라보던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네가 그저, 이렇게 살아있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거든.」
자상스런 말을 남기며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론 가능하다면 나와 함께 사진 찍자. 앞으로도 추억을 늘려나가자, 이 앨범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응, 그래요.」

창문 너머로 북풍이 울린다. 그림자 드리운 겨울 거리 한모퉁이에 흐릿한 빛이 어렴풋이 비친다. 밖은 춥지만, 이 방은 무척 따뜻해. 그건 지금 소타 씨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살며시 그의 어깨에 기댄다. 그가 이곳에 있음을 느낀다. 조용히 흘러가는 소리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앨범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   *   *

때때로 되풀이하는 꿈이 있다.
그리워서, 편안하지만, 한편으론 슬프고 조금은 쓸쓸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안개처럼 눈앞이 뿌옇게 흐릿하다. 마치 눈물 맺힌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어느덧 조금씩 눈앞이 트이며 서서히 선명해져간다.
바람을 타고 무언가가 흩날리고 있다. 몽롱한 의식 속 아름다움에 이끌린다. 어느새 나는 봄바람같은 따스함에 휩싸여있다.
이건 분명 새벽녘이야. 희붐한 빛 속으로 걸어간다. 발밑엔 희미한 초록빛 대지가 펼쳐져있다.
끝없이 이어진 들판을 바라보면 여러 빛깔의 꽃들이 피어있다. 본 적 있는 꽃도, 본 적 없는 꽃도.
하얀 꽃도, 붉은 꽃도, 자주빛 꽃도, 푸른 꽃도, 그리고―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어깨를 살며시 감싸는 감각에 난 잠에서 깼다.
「아, 깨워서 미안해.」
천천히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거기엔 소타 씨가 있었다. 내 어깨엔 어느새 담요가 덮여있었다.
「미안, 늦었지.」
「아냐, 나도 깜박 졸았는걸. ……어서 와요, 소타 씨.」
오늘 밤엔 소타 씨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었다.
눈을 비비며 책상에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왠지 모를 안타까움에 손을 뻗으며 꿈을 더듬었다.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아련한 추억같은 그것을.
쓸쓸했지만, 다정해서, 끝간 데 없이 따스했던 추억처럼.
그리고 그 때,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던 것 같아서. 그리운 누군가의 모습, 그건 누구였을까.
「스즈메, 괜찮아?」
「꿈이…… 아냐, 괜찮아.」
설명할 자신이 없어 말끝을 흐렸다.
「스즈메도 요즘 피곤했겠지.」
그런 날 걱정하듯 그가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그러네, 요즘 간호학교에서 실습도 시작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음지으며 난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았다.
잠든 날 걱정하듯 소타 씨가 덮어준 담요는 그의 따스함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촉감이 좋아서 맘에 든 이 노란색 담요는, 소타 씨의 방에 자주 오다보니 내가 갖다놓은 물건이다.
담요 말고도 머그컵이나 칫솔, 함께 산 수저, 그렇게 조금씩 이 방에 내 물건이 늘어나는게 마치 행복이 늘어나는 것만 같아서 기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소타 씨가 내 얼굴을 보고는 빙긋 웃음지었다.
「왜 그래?」
이번엔 내가 소타 씨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잠깐 딴생각하느라. 잠이 덜 깬 모습도 사랑스럽구나 싶어서.」
「아, 사랑스럽다니. 또 어린애 취급이네.」
부끄러운 나머지 이런 말을 내뱉어버린 내 마음쯤은 모두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 그는 미안하다며 웃어보인다. 이럴 때마다 역시 소타 씨에겐 못 당하겠구나 싶기도 해.
「스즈메도 매일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주말엔 같이 어디 놀러갈까. 왜 저번에 가고 싶다고 했던 곳 있잖아.」
「어, 테마파크? 정말!?」
마침 날씨도 좋을 것 같다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신난다」
무심코 의자에서 일어나 소타 씨의 허리를 껴안았다.
「아, 배고프지? 밥 만들게. 야키우동 괜찮아?」
「그래. 감자샐러드도 넣자.」
「후후, 그 토핑 소타 씨도 맘에 들었구나.」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반신반의했지만.」
「하지만 먹어보니 의외로 잘 어울리지? ……소타 씨도 맛있게 먹어서, 정말 다행이다.」
부엌에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우리 사이에선 이미 단골 메뉴가 되어버린 야키우동을 언제든 만들 수 있게끔, 소타 씨의 냉장고에도 언제나 감자샐러드를 준비해두었다. 야키우동에 감자샐러드를 토핑으로 넣는 색다른 어레인지 역시 타마키 씨께 배운 레시피였다.
같이 있을 때조차 같이 식사하는게 불가능했던 시절도 이젠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처음으로 소타 씨가 야키우동을 먹어주었을 땐 조금 감동해버렸던 기억이 새롭다.
프라이팬에 돼지고기를 볶는 동안 양배추와 당근을 꺼내 도마 위에서 다듬는다.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새삼 행복해.
특별한 시간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는 걸. 그걸 잃어버린 적이 있는 난 잘 알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야말로 실은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기쁘다는걸, 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품게 된걸까.
그건 분명 소타 씨를 만났을 때부터야. 둘이 함께했던 여행. 그때부터 난 좀 더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게 됐으니까.

「저기, 소타 씨. 계란후라이 올려줄래요?」
야채를 볶으며 소타 씨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소타 씨?」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손을 닦으며 방으로 향하자, 소타 씨는 소파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잠들어 있었다.
「……소타 씨도, 실은 피곤했으면서.」
조용히 눈감은 그를 바라보며 난 빙긋 웃음지었다.
기왕이면 갓 만든걸 먹어주었으면 좋겠어, 나도 같이 먹고 싶고, 그러니까 저녁은 조금만 이따 먹어야지.
지금은 이대로 좀 더 자줬으면 해.
나는 의자 등받이에 걸려있는 노란 담요를 집어들어 아까 내게 해줬던 것처럼 소타 씨의 어깨를 살며시 덮어주었다.

     *   *   *

쇼윈도엔 귀여운 봉제인형과 세련된 악세사리, 화려한 디저트가 가득하다.
캐릭터 샵 진열대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념품이 늘어서 있어 마치 공주님들의 파티 회장인 것처럼 눈부셔서, 구경하고 있자니 뭐든 다 갖고 싶어져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이거 어때요 소타 씨, 너무 귀엽지 않아요?」
「그러네」
봉제인형 선반 너머 소타 씨와 눈이 마주쳤다. 쿨한 표정의 소타 씨조차 마치 여기에 원래부터 있었던 캐릭터마냥 친숙해보인다.
「오늘은 왠지 들뜬 스즈메를 보러 온 것 같네.」
「어― 그럼 소타 씨는 재미없어요?」
그러자 소타 씨는 기침소릴 내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야 당연히 재미있지.」
우린 함께 웃으며 동화 속 꿈의 나라로 뛰어들었다,

지난번 약속대로, 우린 주말을 맞아 테마파크로 왔다. 평소보다 조금은 따뜻하고 날씨도 좋아서인지 휴일의 테마파크는 손님으로 붐비고 있었다.
우린 곧바로 여러 놀이기구로 돌아다녔다. 인기있는 스플래쉬 코스터를 탄 후엔 낙하순간이 촬영된, 날짜가 새겨진 기념사진도 사기로 했다. 얼마 전 함께 봤던 앨범에 바로 이 사진을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무서운 호러계 열차를 탈 땐 역시 긴장했지만 소타 씨가 끝까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증기선을 타고 정글 사이로 내려갈 땐 에히메행 페리가 살짝 그리워졌다. 이상한 나라를 본딴 화려한 찻잔에선 소타 씨도 핸들을 돌리며 즐거워했다.

「포장마차 가서 츄러스 사올게. 스즈메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여기저기 둘러본 후 우린 잠시 쉬기로 하고 벤치로 향했다. 소타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난 혼자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눈앞으로 동그랗고 노란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저기, 큰 성은, 어디에 있어요?」
내게 말을 건네는 어린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손에는 노란 풍선을 묶은 끈이 꽉 쥐여져있었다.
「어, 성?」
「길 잃으면, 거기로 오라고」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잔뜩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불안에 짓눌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아직은 서툰 말투로, 하지만 필사적으로 내게 호소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자리를 비우면 소타 씨와 엇갈릴지도 모르지만, 혼자 남겨진 아이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데려다줘야지, 분명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을테니까.
「알겠어, 언니가 지금부터 성으로 데려다줄게. 그러니까 걱정마.」
미소지어보이자, 어린 소녀도 조금은 안심하는 듯했다.

「오늘은 누구랑 왔어?」
「엄마」
「걱정하시겠다.」
어린 소녀의 손을 꼭 잡고 걸으면서 인파를 헤쳐 테마파크 중앙으로 향했다. 성이라면 분명 저기겠지. 이 공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상징적인 성이니까.
무너질 것만 같은 얼굴로, 작은 어깨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불안을 안고 혼자 헤메이는 이 아이의 모습이 문득 어린 시절 엄마를 찾아헤메던 내 모습과 겹쳐보였다.
「괜찮아. 꼭 엄마가 찾아와주실거야.」
그래, 이 아이는 그때의 나와는 달라. 곧 엄마가 찾아와주실테니까.
「언니는? 혼자 왔어?」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 마음이 편해졌는지, 이번엔 어린 소녀가 내게 말을 건넸다.
「아니. 언니도 있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래, 엄마는 더 이상 와줄 수 없지만, 대신 지금은 내게도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누구? 엄마?」
「아니, 엄마가 아냐. 그러네, 그게…… 왕자님?」
「어, 왕자님이 와주시는거야? 대단해!」
어린 소녀가 놀란듯이 날 올려다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대단하지」

어린 소녀가 꼭 움켜잡은 노란 풍선이 걸을 때마다 흔들린다. 인파를 헤치고 조금씩 다가가자 성의 첨탑이 눈에 들어온다. 간신히 도착하자, 성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한 여성이 우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엄마!」
그 순간 어린 소녀도 달려갔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가 엄마에게 뛰어들며 안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데려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엄마는 몇 번이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아니에요, 이정도는. ……무사히 엄마를 만나서 다행이네.」
어린 소녀에게 말을 건네자, 아이는 손에 꼭 쥐고 있던 노란 풍선을 내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저기, 이거, 언니에게 드릴게요.」
「괜찮아?」
「응, 선물이니까」
가볍게 떠다니는 노란 풍선을 건네받았다. 나는 감사인사를 하며 풍선을 묶은 끈을 건네받았다.
사이좋게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엄마와 아이를 지켜보며 나는 홀로 성을 올려다보았다. 시선 끝엔 노란 풍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전 벤치에서 꽤 멀어진 채 나는 혼자가 되어있었다.
「많이 기다렸지― 공주님.」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직이 말을 건네는, 마치 진짜 왕자님인 것처럼.
나는 눈을 감은 채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다리게 했으니 대신 네가 원하는 걸 하나 줄게.」
「……후후, 그럼 전 소타 씨가 좋아요!」
나는 휙 뒤돌아서서 소타 씨를 껴안았다.
「어이쿠, 그럼 츄러스는 필요없어?」
「그것도 필요해! 둘 다!」
「정말이지 넌」
츄러스를 떨어뜨리지 않게끔 신중하게 소타 씨도 나를 안아주었다.
「엇갈린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거 알았어요?」
「돌아가려고 보니 노란 풍선이 눈에 들어왔거든. 그러다가 미아를 데려다주는 널 찾았지.」
「그랬구나. 내버려둘수 없었거든요. 미안해요, 멋대로 가버려서.」
「아니 괜찮아. 넌 상냥하니까. ―그리고 난, 네가 어디에 있든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런 소타 씨의 말이 기쁜 나머지, 나는 말 대신 그의 가슴을 이마로 지그시 눌렀다.

「그럼, 퍼레이드라도 보러 갈까.」
「응!」
다시 걷기 시작한 내 곁엔 노란 풍선이 떠다닌다.
「이 풍선 아까 그 아이에게 받은건데, 내가 들고 다니기엔 좀 유치하려나.」
「괜찮아, 여긴 꿈의 나라니까. 그리고 노란색이 스즈메에게 가장 잘 어울리니까.」
그 말에 안심하며 다시 끈을 고쳐잡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불어닥친 봄바람에 그만 끈을 놓쳐버렸다.
앗, 나도 모르게 소리치려던 순간, 하늘로 날아가려는 풍선 끈 끄트머리를 소타 씨가 재빨리 잡아주었다.
「……아찔했어요. 고마워요, 소타 씨.」
「다행이다, 붙잡아서.」
「응. 모처럼 받은 건데 날아갈 뻔했네.」
자 여기, 소타 씨가 건네준 노란 풍선을 받으려던 순간, 무언가가 가슴 속을 스쳐지나갔다.
―이 느낌을 언젠가 느낀 적이 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
아주 오래 전, 누군가가 상냥하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던 적이.
그건 대체 뭐였을까, 떠오른 느낌은 붙잡히지 않은 채 내 손을 스르륵 빠져나갔다.
또렷이 떠오르진 않지만, 분명 무언가가 기억의 밑바닥에서 스며나오는 것처럼.

푸른 하늘 아래 선명한 노란색 풍선이 무척 눈에 띈다. 대지를 쓰다듬듯 남쪽에서 봄기운이 불어온다. 추운 겨울도 어느덧 끝을 고하며, 봄의 발소리가 벌써 저만치 다가오고 있었다.
「좀 더 따뜻해지면 다음엔 경치 좋은 곳으로 나들이라도 가볼까.」
「피크닉? 와아, 재밌겠다!」
「느긋하게 있고 싶네.」
「응. 봄이 기대된다.」
우린 손을 맞잡고 다가오는 계절을 향해 천천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   *   *

봄이 왔음을 알리듯, 많은 생명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꽃과 풀들이 일제히 싹을 틔우며 약동한다. 완만한 경사, 눈부신 초원이 파노라마처럼 우릴 둘러싸고 있다.
등뒤로 스치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발 아래 꽃잎이 흩날린다. 파란 하늘 저편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나는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4월의 어느 토요일, 피크닉을 위해 찾아온 초원은 이제 막 싹튼 신록으로 뒤덮여있었다. 양떼구름 떠가는 봄하늘도, 발밑에 펼쳐진 푸르름도, 두 눈에 비치는 세상 모두가 반짝여서 눈부시다.
맑은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전망 좋은 초원 한가운데에 스카프를 감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돗자리를 펼쳤다.
소타 씨와 둘이 나란히 앉았다. 돗자리 곁엔 자그마한 풀꽃들이 피어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응. 피크닉은 정말 오랜만이네.」
바람이 불어오자 우릴 둘러싼 초원이 함께 흔들린다. 이곳에서는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하다. 이 풍경은 어째서인지, 어디인가 그리웠다.
그때 소타 씨가 무언가를 꺾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스즈메에게 딱 어울리는게 피어있더라. 스즈메에게 어울리는 노란 꽃.」
소타 씨에게 건네받은 건 노란 민들레꽃이었다.
순간, 선명히 되살아나며 떠올랐다.
그랬어. ―나는 예전에, 그에게 노란 꽃을 건네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4살 때, 뒷문을 두고 헤메던 저세상의 초원에서.

모든 시간이 스민 듯한 하늘 아래를 헤메며, 엄마를 찾아 헤메던 그 언덕 위에서 아직 어렸던 나는 열일곱 살의 나를 만났다.
생일날 엄마가 만들어준 의자를 건네받으며 난 들었다.
넌 이제부터 제대로 성장하게 될거라고.
넌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거라고, 너를 사랑해줄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될거라고. 언젠가는 반드시 아침이 올거라고.
나는 그 뒤로 열일곱 살의 나, 그리고 나를 데리러 온 소타 씨와 함께 그 문으로 향했다. 원래 있던 세상으로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바람 부는 초원을 가로질러 문이 보일 때까지 소타 씨는 어렸던 내 손을 줄곧 잡아주고 있었다.
「자, 이제부턴 혼자서 걸어가야 해.」
문이 가까워지자 소타 씨와 열일곱 살의 나는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드는 날 바라보며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꼭 쥔 내 손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하지만 어렸던 난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었다. 무서웠으니까.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문 너머엔 내가 찾아헤메던 엄마는 더이상 없다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저, 저기, 스즈메도, 여기 있으면 안돼요?」
또다시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울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참으며 나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스즈메, 넌 여기 있어선 안돼. 문 밖으로 나가서, 살아가야 해. ……아직 너무 슬프더라도.」
열일곱 살의 나는 그 때 나만큼이나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미래를 아직 믿지 못해, 혼자서 다시 문 너머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던 내게 갑자기 소타 씨가 무릎을 꿇고 마주앉았다.
내 발밑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꺾었다. 키가 큰 소타 씨가 나와 눈을 맞추며 건넨 건 마침 그곳에 피어있던 민들레꽃이었다.
「와, 노란 꽃이다. 스즈메 의자랑 똑같아.」
「이건, 행복이란 의미를 가진 꽃이야.」
소타 씨는 내 작은 손바닥에 꽃을 쥐어주었다.
「들어줘. 지금은 아직 너무 슬프고 괴롭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너는 반드시 행복해질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소타 씨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냥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넌,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민들레의 꽃말은 『행복』.
짓밟혀도 금세 다시 일어서서 몇 번이고 발밑에서 피어난다.
노란색은 나를 이끄는 색깔.
그렇게 행복은 다시 찾아온다.
그때, 모든걸 잃어버린 어렸던 내게, 행복이라는 의미를 가진 민들레꽃을 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의자와 같은 색깔의 꽃, 이 노란색이, 언젠가 반드시 네게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알려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 생각났어요. 그때도 소타 씨가 이 꽃을 주었던 거. 꽃말을 가르쳐줬던 거.」
손바닥 끝 민들레꽃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때,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를 주었던 건, 소타 씨였구나.」
꽃을 바라보던 눈빛 그대로, 소타 씨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랬었지. ……그때, 어렸던 넌 너무나도 슬퍼보였으니까. 내가 줬던 꽃이, 조금이라도 내일을 향한 희망이 될 수 있었다면 정말 다행이다.」
그때 소타 씨에게 받은 꽃은 눈보라치는 밤 눈밭을 헤메다 어딘가에 떨어뜨리고 말았겠지만, 그럼에도 마치 의자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그 노란색은 줄곧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분명 그래서 난 노란색을 좋아하게 된거야. 이 색깔은 나를 이끌어주는 색깔이란 걸 알게 됐으니까.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색깔이란걸 알려주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이렇게 다시 소타 씨에게 받은 민들레는 이번에야말로 여기에 있어.

『넌,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귓가에 지금도 남아있는 상냥한 목소리. 그가 건네준 민들레와 함께, 그때 건네준 말이 오늘과 겹쳐온다.
그 말대로 지금 전 행복해졌어요.
전 미래의 내가 알려준 대로 제대로 성장해서, 사랑하는 사람도,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만나서, 그 사람이 제게 행복을 알려주었어요.
행복이란 꽃말을 가진 민들레를 손에 들고, 나를 이끌어주는 노란색을 들고.
「고마워요 소타 씨. 나, 행복해졌으니까. 나 지금 정말 행복해.」
언제나 발 아래 피어있었던 꽃이, 그걸 내게 준 사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분명.
더 이상 살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슬플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슬픈 일들도 모두 언젠가는 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단 걸 지금은 알 것 같아.
「스즈메, 사실 민들레의 꽃말은 행복만이 아니야. 그땐 정말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건넸지만, 지금 네게 건네는 이 꽃은 그것 말고도 다른 마음도 담겨있어.」
「다른 하나라니? 어떤 꽃말이에요?」
「그건, 그」
조금 망설이는 듯 말끝을 흐리더니, 그는 상냥하게 내 귀에 속삭였다.
손에 쥐고 있던 민들레가 손 안에서 흔들린다.
봄이 왔음을 알리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   *   *

「―네가 태어나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단다.」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나는 오랜만에 그리운 추억을 이야기했다. 무릎 위에 안긴 딸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아이의 오뚝한 콧날은 그와 꼭 닮았지만, 눈매는 나를 꼭 닮았다.
「응? 그 꽃, 다른 꽃말은 뭐야?」
재촉하듯 아이가 날 돌아보았다. 이제 막 네 살이 된 아이. 그러고 보니 그 시절 나와 같은 나이구나, 이 아이는 그런 쓸쓸함 없이 축복과 행복에 둘러싸여 자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며.
「그건 말야.」
살며시 눈앞에 핀 꽃을 꺾어 딸에게 건네주었다. 천진난만하게, 씩씩하게 하늘을 향해 피어있는 노란 민들레였다.
그때 그에게 받은 말을 네게 선물할게. 이 꽃에 담긴 또 하나의 마음을 담아.

「진실한 사랑? 진실한 사랑이 뭐야?」
「그러네.」
그리운 앨범을 살며시 넘기듯, 나는 조용히 일어나 아직 자그마한 딸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언젠가는 말야. 너도 알게 될 거란다.」
미소지으며 손을 잡고 걸어간다. 딸아이를 가운데에 두고 그가 오른손을, 내가 왼손을 잡아주며.
그렇게 행복은 다시 찾아온다. 분명 노란색은 앞으로도 행복을 가져다줄거야. 나에게, 그에게, 그리고 이 아이에게.
문득 올려다보니 발 아래 피어오른 꽃잎이 푸른 하늘에 흩날린다. 뭉게구름 아래, 살포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마주하며 셋이서 초원을 걷는다.
소중한 가족과 함께 이제부터 새로이 찾아나갈 노란빛 행복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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