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오지역.
캡슐호텔에서 잠을 설치다 2시간 자고 주먹밥 하나 쥐고 신귀산으로 향했다.
신귀산은 접근성이 괜찮은 편인데 오사카에서 나라 가는 길목에 있고 그리 머지 않은 곳에 호류지도 있다.
동네버스를 잡아타고 신귀산으로 향한다.
이 버스 배차간격이 1시간에 1대니 어느정도 시간을 맞춰서 오는게 효율적이다.
일부러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주위 경치를 확인해본다.
목적지인 쵸고손시지朝護孫子寺까지 1km 정도만 걸어올라가면 된다.
동네분위기는 산촌 그 자체다.
적막에 싸여 망중한이다.
신귀산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터전은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했다.
역시 천천히 올라가보길 잘한 것 같다.
사찰 입구를 통과하면 이렇게 대뜸 호랑이 인형들이 반겨준다.
쵸고손시지는 비사문천을 모시고 있으니 당연한 모습들이다.
인월寅月을 보니 사인검 생각나서 재미있다.
방문객이 꽤 많았는데 기본적으로는 비사문천 보러 오는 듯했다.
오마모리 등 기념품도 비사문천의 점유율이 높다. 교통안전기원 등...
석등 너머로 보이는 본당.
쇼토쿠 태자를 비롯해 여러가지 많은 인연이 있는 사찰이라 상당히 규모가 있다.
일본의 유명사찰들은 평지에 자리한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산사인 것도 재미있다.
본당으로 향하는 길.
이곳 본당에서는 승려들이 꽤 본격적으로 독경을 하기 때문에
시간대를 맞춰가면 즐겁게 감상이 가능하다.
산줄기 사이로 울려퍼지는 독경소리가 상당하다.
사찰을 뒤로 하고 주목적지인 신귀산 공발호법당으로 향한다.
에마키絵巻 중 하나인 국보 신귀산연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귀산에서 비사문천을 보았던 인연을 계기로
신귀산 아래 쵸고손시지에 불법을 닦고 있었던 승려 묘우렌命蓮은
직접 탁발하지 아니하고 법력으로 바리떼를 날려 부자에게 시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나눠주게 된 쌀이 아까웠던 부자가 바리떼를 창고에 넣고 문을 잠가버리자,
그대로 창고가 공중으로 떠서 통째로 날아가버렸고,
졸지에 창고를 통째로 뺏길 처지가 된 부자가 묘우렌에게 애걸을 하며 쌀을 돌려달라 하자
다시금 바리떼들이 쌀가마를 실은 채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공발호법당은 위 이야기의 주무대이며,
바리떼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
비발 「전설의 비공원반」 飛鉢「伝説の飛空円盤」,
그 모습이 기록된 신귀산연기에마키 - 두루마리를 펼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히지리 아마기미의 에어 두루마리 「聖尼公のエア巻物」
초인 「히지리 뱌쿠렌」 超人「聖白蓮」
이다.
루나틱에서 스펠명이 바뀌는 것은,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대단히 빠르게 이동하는 뱌쿠렌의 모습으로 보아
뱌쿠렌의 과거 행적, 즉 남동생 묘우렌이 그랬듯 무던히 동분서주하며
요괴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려 했던 모습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올라가는 산길은 그럭저럭 험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20~30분 정도 거리다.
신귀산연기의 광경을 되새기며 올라가기에는 적당한 거리다.
중반을 지나면 나라현이 내려다보이며 공발호법 깃발이 무수히 펄럭인다.
과거 묘우렌과 이곳 사람들 역시 이 광경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목길목에 토리이가 꽤 많다.
후시미 이나리신사의 센본도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족히 수십개의 토리이가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쵸고손시지와 공발호법당은 오랜 시간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 주민들의 소망과 감사의 마음이 토리이 하나하나에 스며있다.
공발호법당 정상.
정상 부근 기념품점에서 공발호법 오마모리를 팔고 있다.
아래에서는 팔지 않으므로 필요한 경우 이곳에서 살 것을 권한다.
좀더 시간을 들여 붓글씨로 부적을 받아들 수도 있다.
정상 직전 잠시 앉아서 기념품점 주인과 환담을 나누며 공발호법당에 들어가기 전 마음을 가다듬을 수도 있다.
간단히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건물. 그 주위로 자그마한 토리이들이 감싸고 있다.
아래쪽 어디에서든 시야가 트인 곳으로, 신귀산연기가 쓰여진 당대에는 이렇게 나무가 울창할 수 없었을 것이니
더더욱 어디에서든 이곳이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산하는 길.
못내 아쉬워 감정의 마천루를 들으며 몇 번이고 뒤돌아선다.
이제 전시관으로 향한다.
전시관에는 신귀산연기에마키 사본과 쵸고손시지의 소장품 3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입장료는 300엔이며, 손책자 형태로 두루마리처럼 펼쳐볼 수 있는 신귀산연기에마키 출판본을 판매하고 있기도 하다.
입장권과 함께 신귀산연기에마키에 대한 간략한 소개문을 준다.
신귀연산연기는 비창의 권, 엔기카지의 권, 비구니의 권 3개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저기서 비구니尼公란 묘우렌의 누이를 뜻하며, 히지리 뱌쿠렌의 모티브이다.
입장권의 그림은 바리떼가 창고를 통째로 들어올리는, 신귀산연기에마키에서 가장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장면이다.
황망해하는 부자와 놀라워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위 사진은 비구니의 권 첫부분.
이런식으로 3개의 권이 펼쳐져 있으며 아래에 별도로 간략하게 설명이 적혀있다.
자세한 내용과 해석은 일본어로 검색을 해보면 쉽게 접할 수 있고,
해당 사본은 한국 국회도서관에서 직접 열람도 가능하다.
10여년 전 대학생 시절 그렇게 홀린 듯이 신귀산연기를 열람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신귀산에 직접 찾아오게 되었다.
토다이지 다이부츠덴 (동대사 대불전) 에서 기도를 드리는 비구니.
전시관의 문화해설사 할머니께 들은 설명에 따르자면,
위 그림에 묘사된 동대사 대불전은 헤이케의 남도 소각南都焼き討ち 이전의 원형으로,
그 당시의 모습이 묘사된 그림은 신귀산연기에마키가 유일하다고 한다.
동대사 대불전은 사진으로 봐서는 감이 잘 안올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로,
근현대에 지어진 건물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인데,
원래는 그보다도 더한층 컸다는 것이다.
과연 위 그림을 보면 그야말로 개미같이 그려져있는 사람과 그에 대비되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불상을 볼 수 있다.
당시 묘우렌이 입었던 가사라던지
묘우렌이 직접 기록한 당대의 사찰 문건 등을 볼수 있다.
다 둘러보는데에 오래 걸리지 않으니 쵸고손시지에 왔다면 꼭 둘러보자.
비록 사본이라고는 하나 신귀산에서 신귀산연기를 보는 것은 과연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
진본은 나라 국립박물관에서 1년중 2주 동안만 공개한다고 하는데,
문화해설사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색채가 전혀 다르다고 하니 언젠가 날짜를 맞춰 재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후 문화해설사 할머니와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귀산연기와 거기에 담긴 이야기를 읽다가 어찌하지 못하고 이곳까지 직접 방문한 외국인을 보고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쵸고손시지는 비사문천 신앙을 통해 현재도 잘 유지되고 많은 참배객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본당 바로 옆에 자리한 전시관에는 사람의 발길이 없었다.
신귀산연기에 기록된 재건되기 이전의 동대사 대불전,
신귀산연기에 기록된 일본 최초의 야마네코,
카타나로 구성된 옷을 입고 있는 비사문천의 특이한 옷차림,
신귀산연기에 묘사된 지형과 방금 전에 보고 공발호법당에서 보고 내려온 지형의 비교,
당대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모습과 빈 공간 사이사이에 묻어나는 세월.
문화해설사 할머니는 신귀산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대단히 드문 일이라며 흐뭇해하셨지만,
나 또한 신귀산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기왓장의 색채, 비사문천이 이동하는 속도감, 신귀산연기에마키를 그렸던 기법,
묘우렌의 일생, 비구니의 일생, 야키우치에 대한 이야기,
오늘날에도 신앙을 끌어모으는 비사문천에 대한 이야기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꺼내고 있었다.
과거의 동대사 대불전이 기록된 유일한 그림이라며 소개해 주셨지만,
정작 나는 신귀산을 본 뒤에 동대사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나는 히지리 뱌쿠렌의 모티브 아마기미에 끌려 신귀산연기를 보다가 전체 내용에 이끌렸지만,
정작 문화해설사 할머니는 에마키모노에 끌려 학업을 시작하셨다가 쵸고손시지에 자리잡게 되셨다고 한다.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된 인연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이었다.
어쨌든 지금부터 동대사를 보러 가야하니 아쉬움을 끌어안고 길을 나선다.
아침에 산에 올랐는데 벌써 3시가 되었다.
하산하는 버스정류장 너머에 신귀산 료칸이 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저곳에서 1박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공발호법당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작정이다.
간사이를 여행중이라면 신귀산을 한번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행중 동대사 대불전, 니시혼간지, 산쥬산겐도 등 명사찰을 여럿 마주하였지만
결국 가장 마음에 남은 곳은 10여년 전부터 먼 곳에서 그려본 신귀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