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공원

12월 초의 우에노 공원.

공원 입구에선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온갖 나라의 노점상에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공원 맞은편 아메요코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제 막 입국한 참이라 여기서 한숨 돌릴까도 생각했지만 발걸음을 서둘렀다.

 

 

 

 

 

 

 

공원에서 한 계단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한적한 벤치.

이런 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창의대彰義隊의 묘

 

보신전쟁 당시 에도성은 무혈개성되었으나, 우에노 칸에이지寛永寺에서 농성하며 저항을 이어나간 세력이 있었다.

칸에이지 자체가 에도 성의 동북방 귀문에 해당하여 초대 쇼군 이에야스 때로부터 어느정도 군사적 성격을 가진 사찰군으로 성립되어 있었고, 대승정 텐카이天海가 기진받아 신경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에도 막부로서도 일종의 성지적 성격을 띠는 곳이기도 하다. 창의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복위, 요시노부의 신변보장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며 결집했고 심지어 닛코 린노지輪王寺의 주지였던 황족 린노지노미야 쿠겐호신노輪王寺宮公現法親王를 추대하여 대립천황을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신정부로서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태가 되어 우에노 전투가 벌어졌다.

  • 이후 린노지노미야 쿠겐호신노는 오우에쓰열번동맹에 의해 토부 덴노東武天皇로 추대되었으나 실제로 즉위하지는 않았다.
  • 간토 방면에 반드시 황족을 두어 대대로 도쿠가와와 연이 있는 사찰의 주지를 맡게 한 것은 이에야스 대로, 이 부분은 조정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제2의 남북조 시대를 거쳐서라도 에도 막부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이에야스의 안배가 아니었나 여겨진다.

칸에이지 공성 계획을 세운 것은 이후 일본 육군의 기틀을 세우게 되는 죠슈번 유신지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였다고 한다. 암스트롱포를 내세운 공격에 창의대는 패주했고 전사자 260여명이 나왔다. 이후 1874년, 생존자 중 일부가 신정부의 허락을 득해 이곳에 묘지를 세운 모양이다. 이후 해당 일족이 관리해오다 2003년에 들어서 도쿄도로 이관되었다.

 

 

 

 

 

 

 

그 옆에 있는 것은 우에노와 연이 있는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의 동상.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칸에이지 기요미즈칸논도清水観音堂

 

이에야스가 오고쇼로 있던 시기, 대승정 텐카이의 주관하에 세워진 칸에이지의 사찰이다. 이름에 清水가 들어가듯이 이 사찰은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清水寺를 의식하여 세워진 것으로, 기요미즈데라와 유사하게 무대舞台 양식을 이루고 있다. 교토의 귀문 방향인 히에이잔比叡山에 엔랴쿠지가 있듯이, 에도성의 귀문 방향인 우에노에 칸에이지를 세우고 교토의 사찰과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하려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좀더 걸어들어가면 우에노 도쇼구上野東照宮가 있다.

히에이잔에 히요시타이샤가 있듯, 신불습합에 의거하여 신사를 세워둔 모습인데

제신으로 에도막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 중흥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그리고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를 모시고 있다.

 

 

 

 

 

 

 

이에야스의 영묘는 닛코 도쇼구에 있지만, 에도 성에서 지척인 이곳에도 모셔둔 느낌이다.

요시노부를 생각하며 인사를 했다.

 

사견이지만, 창의대가 했던 행위를 요시노부가 직접 했다면 보신전쟁은 장기화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고 히토츠바시파 역시 난키파를 제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과거 쇼군과는 달리 요시노부의 정권 자체가 천황의 권위에 기반했으니만큼 명분상의 불리는 피할 길이 없다. 나아가서는 요시노부의 정치적 기반이자 실가인 미토번부터가 미토학의 발상지로 요시노부는 역대 쇼군에 비해 존황사상이 강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과 32세에 칩거하게 된 요시노부가 무슨 생각을 하며 공순을 결정하고 슨푸에서 남은 생을 보냈을지 상상해본다.

더 나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막부의 뿌리를 미나모토源로부터 찾았으며 가마쿠라에서 가까운 에도에 터를 잡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미나모토 막부는 비록 호죠 싯켄의 결과라고는 해도 조큐의 난承久の乱으로 인심을 잃은 바 있으며 무로마치 막부는 시작부터 남북조시대를 거치며 결과적으로 조정과 대립각을 세우며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을 암살하는 등 악명을 남겼다. 권력이 강성할 때는 괜찮더라도, 멸망할 때는 그런 과오들이 명분이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 이치. 때문에 요시노부는 무혈개성을 결정하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わが国の風儀として、朝廷の命令で兵を指揮するときはどんな法令でもことごとく行われる。たとえ実際には今の日の公卿や大名の様なやからから申し出て命じられたことであっても、勅命といわれると、間違えたり背いたりするのは難しい国風がある。そうであればいま薩摩藩らの新政府軍と戦い、こちらが勝利を得たとしても、万が一にも万が一、天皇をも過って討ってしまえば、末代まで朝敵の悪名はまぬがれがたい。こう考えれば、きのうまでわが徳川宗家に志を尽くしてきた大名らが、いまみな勅命に従おうとしている理由も明らかであろう。よしんば、従来の情義によってわが家に加担する者がいるのだといっても、そうしてしまっては国内各地に戦争が起こり、300年前のような戦乱の世にまいもどってしまい、みなが天の裁きを待つほかなくなってしまう。そもそも東日本へ帰ってきてから、予(自分)の心はすでに決まっており、いささかも動揺していない。だが重臣から末々の役人までも、予の心を察する者は多くない。ただ多くの者たちは、無罪の予が汚名を受けたと憤って、勅命をゆがめている者を深く憎み、ややもすればこの国を紛争地域としてしまう心配もしていない。わが家、中興の祖から今で260年あまり、いやしくも天朝の代官として武士庶民の父母となり国を治めてきた功績を、どうして一朝の怒りに任せなにもかもなきものとしてしまうべきだというのだ。このうえ、なおも予の本意(恭順)に背いて、わたくしの意地を張って兵を動かそうとする者は、わが家代々の霊位にとってすでに忠臣ではない。ましてや皇国にとっては逆賊たるべきだ。予は朝から晩までこのことを臣下に申し諭しておるのだ」

「우리나라의 풍습으로는, 조정의 명으로 병사를 지휘하는 경우 어떤 법령이라도 모두 지켜 실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어 있다. 비록 실제로는 지금의 공경이나 다이묘 같은 무리가 건의하여 내려진 명령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칙명이라고 불린다면, 이를 잘못하거나 거스를 수 없는 국풍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사쓰마번 등의 신정부군과 싸워 우리가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라도, 만에 하나 천황께까지 잘못하여 위해를 가하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 가문은 말대까지 조적朝敵이라는 오명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도쿠가와 종가를 위해 충성을 다해온 여러 다이묘들이 지금 모두 칙명에 따르려는 이유도 분명해질 것이다. 설령 예전의 정의情義로 인해 우리 집안을 돕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전국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 300년 전처럼 난세로 되돌아가고, 모두가 하늘의 심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애초에 동국으로 돌아온 뒤로 나의 마음은 이미 굳게 정해져 있었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중신에서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내 뜻을 헤아리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많은 이들은 죄 없는 내가 누명을 썼다고 분노하고, 칙명을 왜곡하는 자들을 깊이 증오하여, 조금만 잘못하면 이 나라 전체를 분쟁의 장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우리 가문은 중흥의 조상 때로부터 지금까지 260여 년 동안, 천황의 대관으로서 무사와 서민의 부모가 되어 나라를 다스려온 공적이 있는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의 분노에 그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이상, 나의 본의(공순恭順)에 어긋나게 사사로운 아집을 부려 군사를 움직이려는 자는, 우리 가문의 역대 신령에게조차 더는 충신이 아니며, 하물며 황국에 있어서는 역적이 될 뿐이다. 나는 밤낮으로 이 사실을 신하들에게 거듭거듭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도쇼구 경내의 감귤나무와 오층탑.

 

 

 

 

 

 

 

오층탑은 옆의 우에노 동물원 내에 있다. 동물원 대기줄이 꽤나 길었다.

우에노는 도쿠가와 막부의 성지나 마찬가지인 곳이고 가깝게는 막부 잔당과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니...

정치적 의도가 얼핏 엿보이기도 한다. 물론 메이지 시대의 동물원이라면 문명개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사민평등의 기치에 따라 막부의 성지를 일반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취지... 문명개화...

전투로 엉망이 되어버린 우에노를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막부 잔당이 다시 결집하지 못하게끔 하는 효과도 생각해보지 않은건 아니지 않을까...

노골적인 정치적 계산이 아닌, 어떤 의미 시대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접근성 좋은 공원이니만큼 여기서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도쿄시민도 많았을 것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주워섬기며 우에노 공원을 내려갔다.

 

 

 

 

 

 

 

 

우에노 공원에서 빠져나가는 길. 역시 늦가을 정취가 풍긴다.

메이지 시대에 조성되었으니만큼 당시의 건물양식이 눈에 띈다.

마침 접근성 좋은 공원으로 조성되기도 했고... 원래 있던 건물은 우에노 전투때 소실되었을테니...

 

 

 

 

 

 

 

 

 

우에노 공원을 얼추 다 빠져나오면 있는 칸에이지의 근본중당.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고, 우에노 전투 당시 소실되어 사이타마에 있던 사찰 건물을 옮겨온 것이다.

근본중당의 원래 위치 또한 이곳이 아니라 현재의 도쿄국립박물관 근처.

 

 

 

 

 

 

 

바로 뒤편 학교 (= 근대적 건물) 과 상당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칸에이지의 당대 모습.

토에이잔東叡山이라는 명칭도 교토의 히에이잔比叡山을 의식한 듯한 지명이다.

우측 아래는 현재의 지도.

 

 

 

 

 

 

 

늦가을 단풍에 어우러진 근본중당의 건물이 아름다웠다.

닛코도쇼구와 시즈오카(슨푸)도 언제 다녀와야 할텐데...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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