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성에 일가견이 있었던 히데요시가 혼신의 힘을 다해 쌓아올린 오사카 성.
현재의 규모는 당시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 위용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露と落ち露と消えにし我が身かな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나의 몸이여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나니와의 영화는 꿈속의 꿈
히데요시의 사세구처럼 오사카 성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장래를 오대로와 오봉행에게 눈물로 애원하며
사실은 어느정도 예감은 했을지도 모른다. 맞지 않았으면 하는 불길한 예감.
위 사진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자결한 장소로 전해지는 곳이다.
오사카 여름의 진,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야전도 이윽고 끝나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화 속에 그들은 이곳에서 짧은 삶을 마무리한 것이다.

주인 잃은 성은 장대한 규모를 간직한 채 400년이 지난 아직도 서있다.

한편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는 출가하여 고다이인高台院이 되어 고다이지高台寺에 머물렀다.
그야말로 히데요시에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 흙집에서 서로 결혼하고
히데요시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터로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네네는 친척들을 거두어 친자식처럼 교육시켜 후다이 가신이 없었던 히데요시에게 힘을 보태었다.
나가하마 성주 시절에도 이는 그대로 이어져 사실상 네네가 성주 대리를 맡았고
히데요시가 내건 시책을 네네의 명의로 수정하는 일조차 빈번했다 전해진다.
히데요시는 천하인이 된 이후에도 원정을 나가면 네네와 모든 사안을 의논하고
심지어 오다와라 전투 때도 포진을 설명한 편지를 보내는 등 모두를 공유했다.
유방에게 있어 한신과 소하가 있었듯,
히데요시에게 있어 군재를 거드는 동생 히데나가와 내정을 총괄하는 네네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전 히데나가가 사망하고,
첫아들이었던 히로이가 요절하고 친어머니 오만도코로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조급해진 히데요시는 무리수를 두게 되고 대패라는 결과물 속에 어떻게든 오대로와 오봉행을 끌어모아 훗날을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꽃피운 다이고의 벚꽃놀이醍醐の花見는 그다운 해학과 회한이 담긴 모습이었다.
네네는 교토에서 천황을 포함한 공경귀족들과 갖가지 행사를 주관하며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친자식처럼 손수 키운 수많은 다이묘 - 심지어 2대 쇼군 히데타다까지 포함되는 - 또한 네네의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천하인이 된 이에야스를 막을 힘까지 있지는 않았고,
네네는 히데요시와 함께 쌓아올린 것들 중 아주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남길 수 있게끔 진력하며 여생을 보낸다.

네네가 말년을 보낸 고다이지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2대 쇼군 히데타다는 12살 때 도요토미 가문에 인질로 보내졌고,
네네는 언제나처럼 히데타다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어린 시절의 고마움을 잊지 않은 히데타다는 쇼군이 된 뒤에도 교토에 들릴 때마다 가장 먼저 네네를 찾았고,
1만 석이 넘는 영지와 함께 본인 입장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한다.
심지어 히데요시의 조카에게 기노시타木下 성을 쓸 수 있게 해주어,
소소하게나마 다이묘로서 에도시대 내내 그 후손이 내려오게 된다.
히데요시와 네네에 대한 다종다량의 유물이 전해지는 것은 그 덕분으로,
유명 다이묘의 정실부인의 본명조차 좀처럼 전해지지 않는 시대상에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후세에 전해진다고는 해도 네네가 히데요시와 쌓아올린 대부분은 네네가 죽기 전에 모두 무너졌다.
오사카 전투의 결과로 히데요시의 손자인 쿠니마츠国松마저 처형되었다.
그러고도 네네는 9년을 더 살다 갔다. 위 경치를 보며 네네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가히 짐작하기 힘들다.
히데요시의 사세구처럼, 모든것이 꿈속의 꿈인 것인지.
불교에 귀의한다고 해서 잊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고다이지를 나서니 네네 거리가 조성되어있고, 1624년에 사망한 네네의 400주년 기념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장소였다. 인간의 일생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