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마츠모토에서 출발하여 토야마에 도착.
노면전차가 시내교통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히로시마에서도 봤지만 재미있는 광경이다.
이곳 고장의 명승지들... 시라카와고... 타카야마... 히다... 게로...
타카오카高岡로 이동하여 즈이류지瑞龍寺 입구길.
길이 상당히 잘 닦여있는데, 반대방향으로 가면 카가번 2대 번주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의 묘소도 있다.
즈이류지는 마에다 가문의 지원을 받았으므로, 의도된 배치일거라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즈이류지는 조동종 사찰이지만,
이곳이 잇코잇키의 중심지 중 하나였기 때문인지 신란親鸞상도 있다.
바로 근처에는 마에다 토시나가의 상이 있다.
즈이류지 옆에 딸려있는 이나리신사.
사찰 입구로 들어선다.
조동종 사찰인걸 생각하며 보니 린센지林泉寺와 어딘지 비슷한 분위기같기도 했다.
국보 불전仏殿.
선종으로서의 조동종 양식이 잘 남아있는 보기드문 예라 한다.
외부와 격절되었다는 착각을 주는 인상적인 경치.
건물 안쪽의 공간들을 직접 볼 수도 있다.
타카오카는 8세기 만요슈万葉集의 대표적 가인 중 하나인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와 인연이 있다 하는데,
만요슈의 와카 4516수 중 야카모치가 남긴 것이 473수, 그 중 타카오카를 다스리며 지은 것이 223수라 한다.
밖을 향한 경치가 제법 그럴듯하다.
당대 사람들이 보았을 경치라 생각하면서 보면 흥미롭다.
감주로 마무리.
감주를 팔던 매점 옆에 적당한 흡연실이 있어
한대 피우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사찰의 특성상 마에다 토시나가 묘소도 가보고 싶었지만,
앞뒤로 지나치게 무리했기에 체력안배 차원에서 가지 않고 다음 행선지로.
타카오카역으로 가는 길.
이런 주위 민가의 일상적 풍경도 항상 주의깊게 살펴본다.
사적지는 과거의 모습, 주위 민가는 현재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볼 풍경.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해당 사적지를 어떻게 생각할까ㅡ 같은 대목을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쇼코쿠지勝興寺행 버스에서 내리니 지역주민 할머니께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계셨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허리가 아파서 저렇게 유모차를 끌고 다니곤 했었는데...
좌측 숲 너머가 쇼코쿠지.
입구 너머로 보이는 카라몬唐門.
카가 번주 마에다 가문의 후원 속에 건립된 즈이류지와 달리,
이곳 쇼코쿠지는 혼간지 렌뇨本願寺蓮如의 호쿠리쿠 포교 과정에서 건립된 정토진종 사찰이다.
이후 부침을 거듭해 카가 잇코잇키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가,
마에다 토시이에 이후 에도 막부 내내 카가 번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어져 내려온 사찰이다.
사찰명인 쇼코쿠지勝興寺는,
조큐의 난承久の乱 이후 사도가시마로 유배된 준토쿠 덴노順徳天皇가 사도가시마에서 건립했다 전하는
「殊勝請願興行寺」에서 글자를 빌려와 지었다 전한다.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된 준토쿠 덴노의 사찰에서 이름을 따온 점은
당시 정토진종, 그리고 정토진종을 따르던 민초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재미있다.
그런 부분을 대변하듯 안내판에도 조큐의 난이 아닌 조큐의 변承久の変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국학, 존황파들에 의해 18세기 이후 논쟁이 다시금 펼쳐지고 시대에 따라 조큐의 난에 대한 평가도 바뀌어간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임금이 역적을 토멸하려다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오히려 폐위당한 것을 어떻게 난이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특히 천황중심주의가 극대화된 전전 쇼와 시기에는 막부 쇼군들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는 한편 조큐의 난을 조큐의 변으로 부르는 경우도 늘었다 한다. 1920년 당시의 국정교과서인 심상소학국사尋常小学国史에서 조큐의 변으로 표기한 것이 그 시초라 하며, 심지어 당시 상공대신이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그래도 인격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글을 기고했다가 역적이라는 비난을 듣고 사임한 사례까지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조큐의 난 당대에는 고토바 상황, 준토쿠 덴노에 대한 여론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대의 기록을 보면 공경귀족들조차 대체로 패도를 추구한 끝의 자업자득이라며 냉소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당대, 근대의 평가가 다르고 쇼코쿠지가 건립될 당시의 정토진종 시점에서의 평가가 또 다른, 이런 것이 역사의 재미 중 하나가 아닐까.
경내에 들어서자 나오는 쇼코쿠지의 7대 불가사의.
일단 살펴보자.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라 한다.
불가사의 중 하나인 열매를 맺지 않는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원래 암수가 있어 한 그루만 심어두면 열매를 맺을 수 없... 다고 하면 안되겠죠?
불가사의 중 하나인 연못.
수원이 보이지 않는데도 유지되는 연못이 신비롭게 여겨지는게 미사야마 신사에서 보았던 연못과도 비슷하다.
경내는 평화롭다.
한때는 이곳에 잇코잇키가 가득했겠지만...
무지막지한 규모가 이곳이 정토진종 사찰임을 상기시킨다.
사찰이라기보다 군사시설에 가까운...
이렇듯 본당에서 이어지는 회랑이 있는 것도 정토진종 사찰의 특징인 듯하다.
니시혼간지, 히가시혼간지에서 익히 보았던 양식.
바로 옆 보물전에서 내부구조를 견식할 수 있다.
당시의 부엌 및 화로.
근대에 촬영된 쇼코지의 모습.
서원書院.
에도 시대 당대의 주위 모습을 그린 병풍.
다케다 신겐, 카츠요리 부자가 연명으로 보낸 문서로,
다케다와 대립중이던 우에스기 겐신에 대한 대응을 주문하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동진하여 이토이가와를 넘으면 에치고이니...
다케다 - 잇코잇키 - 아자이 · 아사쿠라 - 아시카가 쇼군 - 코노에로 이어지는
당시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익의 편린이면서도,
정토진종과 접촉을 시도한 다케다 가문의 움직임 역시 엿보이는 재미있는 사료.
쇼코지는 극히 최근인 레이와 4년 (2022년) 에 국보지정되었다.
여타 두 불가사의.
쇼코지에서 나오자마자 마련되어있는 오토모노 야카모치 상.
그가 남긴 와카 중 1수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사찰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흥미롭게도 이런 건물이 있었다.
일본 최초의 사설 기상관측소라 한다.
전근대와는 별도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이 땅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갔을지에 대한 흔적 중 하나.
쇼코지에서 후시키역伏木駅으로 내려가는 길이 사찰거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한창 시절엔 이곳 좌우로 여러 점포와 자그마한 사찰들이 줄지어 있었을 것을 상상한다.
고국부古国府는 고대 엣츄 국부의 사적지
그리고 카가 번 3국 중에서도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사찰거리의 모습을 보존한 유일한 마을
아무래도 율령시대엔 이곳에 관청이 주재했던 모양이다.
이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비석.
히미선을 타고 타카오카로 돌아가려니 이런 안내판이 눈에 띈다.
러시아어 병기라니?
호기심이 동해 찾아보니 이곳은 1990년대부터 블라디보스토크와 자매결연을 맺고 대러시아무역을 하고 있는 모양.
아니나다를까 역내에도 러시아인이 몇몇 눈에 띄었다.
그런데 생김새는 러시아인인데 유창한 일본어를... 더구나 10대... 현지 2세인가...
마무리는 토야마로 돌아와서 토야마 블랙 한그릇.
쇼코쿠지 하나만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상당히 흥미로운 곳이었다.
정토진종 사찰이라는 이력과 엣츄 잇코잇키의 과격성을 생각해보았을 때
당시 저곳이 전쟁터였을 거란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3번에 걸쳐 불타고 재건되었다고 하니...
그런데 마에다 토시이에 이후로는 번정에 협력적, 민중들에 대한 포교에 집중하기로 한 모양.
물론 이시야마 혼간지가 무너진 것도 한 이유겠고,
한편 마에다 입장에서 결국 이 지역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정토진종을 아예 뿌리뽑는 것도 모험이었을 것이겠지만.
그런 그들이 사찰의 이름을 조큐의 난으로 폐위된 준토쿠 덴노의 인연으로부터 따온 것도 재미있고,
그랬으면서도 또다른 막부인 에도 막부에 협력한 것도 재미있고,
그 이후 근세에는 또 어떤 시선으로 이곳이 해석되었을지...
모르긴 몰라도, 전전 쇼와 시절에는 군국주의적으로 해석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사찰거리라는 자부심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런 쇼코쿠지 근처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국보지정된 넓은 사찰을 1시간 동안 혼자서 돌아보았다.
고즈넉한 즈이류지는 나름대로 노년의 단체관광객들이 있었으나...
21세기 이후 또 이곳은 어떻게 변화해가고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기억될 것인지.
체력안배 차원에서 여유롭게 다닌 시간이었지만 꽤 여러가지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니시혼간지는 진작에 다녀왔지만 이게 지방사찰의 또 다른 재미가 아닐까.
교토의 수많은 사적지 사이에 남아있는 니시혼간지보다는,
같은 정토진종 사찰이지만 쇼코쿠지에서 좀더 쉽게 역사의 흐름, 그 맨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