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 / 2024. 11. 12. 23:52

은각사銀閣寺

은각사 올라가는 길.

기온거리의 축소판 같은 관광지 분위기가 난다.

 

은각사는 교토 시내 동북쪽에 있어서 다소 위치적으로 애매하다보니

이번에 시간이 남길래 한번 가보기로.

 

 

 

 

 

 

 

은각사銀閣寺의 본래 명칭은 히가시야마지쇼지東山慈照寺로 통칭 은각사.

 

 

 

 

 

 

 

기본적으로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별장이라 정원 느낌으로 꾸며져있다.

연못 위로 바위가 북두칠성 형태로 정렬되어 있는 모양.

 

 

 

 

 

 

 

관음당観音堂과 함께 현존하는 당대 건물인 동구당東求堂으로 국보지정되어있다.

본래는 아미타당阿弥陀堂이었던 모양.

관음당이 통칭 은각사 건물로, 기본적으로 사찰 형태를 띠고 있다.

 

 

 

 

 

 

 

수령 500년의 거목.

 

 

 

 

 

 

 

확실히 이름이 날 만한 경관이다.

당당하게 펼쳐져있던 금각사 정원과는 달리 이곳은 한군데 한군데가 특정 장면을 잘라놓은 듯이 조성되어 있다.

 

 

 

 

 

 

언덕길을 올라가면 있는 개울물.

쇼군의 차를 끓이기 위한 용수를 이곳에서 소용했던 모양.

 

 

 

 

 

 

 

오른편으로 바라보면 꽤 야성적인 경사면이 보이는데

정황상 공사중인 것은 아닌 듯하고, 교토를 벗어난 어딘가의 산악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경사가 없었던 금각사와 달리 은각사 뒷뜰 정원은 아주 약간의 경사가 있다.

 

 

 

 

 

 

 

뒷뜰에서 내다보이는 히가시야마東山.

 

 

 

 

 

 

 

그 유명한 은각사이자 관음당.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足利의 권세는 불과 6대째에 황혼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는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동생으로,

요시모치의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후계가 꼬이고 말았다.

요시모치 역시 사경을 헤메게 된 상태에서 요시모치의 동생은 여럿이 있었는데,

후계구도를 둘러싼 슈고다이묘守護大名 및 공경귀족들의 분열을 우려한 요시모치는

신의 뜻을 묻는다는 의미로 제비뽑기로 차기 쇼군을 정하게 되고 그렇게 6대 쇼군이 정해진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지만 신의 권위를 빌어야 할 만큼 쇼군위가 이미 불안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게 쇼군이 된 요시노리는 막부 권위 강화 및 전제정치를 행하는데,

나름대로의 결과도 있었지만 결국 쇼군위 13년만에 47세의 나이로 슈고다이묘 아카마츠에게 암살당한다.

요시노리의 장남이 7대 쇼군이 되지만 9살에 요절하고,

그 다음 쇼군이 된게 5남이었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그리고 이 은각사의 주인이다.

 

8세에 쇼군이 된 요시마사에게는 실권이 없었고 이미 쇼군의 권위는 추락하는 상황이었다.

각지의 슈고다이묘 및 공경귀족들은 각자의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하기 시작했고

동서고금 어린 나이에 집권자가 된 자들이 대개 그랬듯 요시마사도 사치와 향락으로 현실도피한다.

교토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히가시야마東山의 은각사銀閣寺는 그렇게 조성된 것.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절정을 달리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별장 금각사가 요시미츠의 자신감을 드러낸 반면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추락한 시기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별장 은각사는 별장 안의 세계에 갇혀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방위상으로는 은각사가 동편에 있지만 고쇼 기준으로는 은각사가 서편이다.

서녘 하늘로 지는 해처럼 무로마치 막부의 시대는 100년도 지나지 않아 저물고 있었고,

남조를 멸망시키고 개창한 무로마치 막부에게는 어떤 독점적인 권위도 명분도 이미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히가시야마에서 은둔에 몰두하던 요시마사를 뒤로 한 채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발발하고

11년간의 전란으로 교토는 생지옥으로 변하고 수많은 문화재가 잿더미가 되었다.

그 속에서 꽃피운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化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것인지...

막부의 권위는 더더욱 추락하고, 그나마 후계자 다툼에서 승리한 요시마사의 정실 히노 도미코日野富子는

친자식을 9대 쇼군으로 세우는데에 성공하지만 그조차 25세에 요절하면서

오닌의 난은 승자 없는 전란이 되고 결국 전국시대의 시발점이 되어버렸다.

 

 

 

 

 

 

 

은각사를 나오면 철학의 길이 있다.

뭐 대단할 것은 없는 길이고, 어딜 가나 사람에 치이는 교토의 주요 관광지를 돌던 여행객이

이곳에서라도 조용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데에 의의가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 여기가 유명해져버리면 원래 의의를 찾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일단은 그렇게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쭉 내려오다보면 금방 민가들이 보인다.

나름대로 중심가에서 거리가 있다보니 동네는 조용하다.

 

 

 

 

 

 

 

동네 어딘가의 오래된 킷사텐에서 소다플로트 한 잔을 하며 무로마치 막부의 종언을 곱씹었다.

그래도 아무튼 멋드러진 별장 하나 남겼으면 된건가?

잘 모르겠다. 해당 시기는 우행의 연속이라...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아마 전국시대의 많은 사람도 비슷한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현재 은각사는 사진 잘 나오는 명소가 되었고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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