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중심지는 이름 그대로 가마쿠라였다. 직전에 패권을 쥐었던 헤이케平家는 교토를 무대로 정치를 행하다 법황의 윤지 아래 겐지源氏에 의해 패망했으므로,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었을거라 여겨진다. 간토의 본거지 가마쿠라에 자리잡은 가마쿠라 막부는 조정과 이원화된 구조로 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이는 교토의 조정에 대한 제어력을 상실하면 조적朝敵으로 선포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고, 완만하게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던 가마쿠라 막부는 마침내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의 토막 윤지에 따른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의 교토 장악,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의 가마쿠라 공략으로 인해 패망한다.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중심지는 교토의 무로마치였다. 직전에 패권을 쥐었던 가마쿠라 막부는 조정 - 막부의 이원화된 체제로 정치를 행하다 천황의 토막령 아래 겐지에 의해 패망했으므로,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었을거라 여겨진다. 교토의 무로마치에 자리잡은 무로마치 막부는 조정을 직접 장악하며 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실권은 막부에 있을지라도 어떻든 천황의 권위라는 명분에 기대는 막부는 이매망량의 교토에서 언제고 정치적인 혼란에 휘말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교토는 수비하기에 좋은 지형이 아니라, 내전의 위험성 역시 내포하고 있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전통적인 권위 이상의 무언가를 위해서였는지 감합무역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장기적인 성과를 거두기에는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남조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하극상 정권이라는 본질적인 한계 역시 뚜렷했다. 무로마치 막부가 교토에 자리잡게 된 것은 피치 못할 이유도 있어, 초기 계속된 남북조 시대에 북조를 교토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정치적 선택은 불가능했으며, 정작 본거지인 간토에서 아시카가는 가마쿠라에 대한 하극상으로 패권을 쥐었기 때문에 반발세력이 만만치 않았으며, 타카우지와 타카요시의 갈등으로 표출된 간토 무사와 서국 무사의 갈등도 있어 간토는 막부의 안정기에도 이미 가마쿠라 쿠보鎌倉公方와 막부 직신, 토착세력 등이 뒤얽힌 전란이 끊이지 않는 상태였다.
결국 무로마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보다도 더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겪어, 남북조 통일 이래 불과 70년만에 오닌의 난応仁の乱, 메이오 정변明応の政変을 거치며 사실상 지방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이름뿐인 막부가 된다.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중심지는 에도였다. 직전에 패권을 쥐었던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에서 조정을 직접 장악하고 정치를 행하다 정변과 내전으로 인해 패망했으므로,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었을거라 여겨진다. 더불어 에도 막부는 통치구조가 유사한 가마쿠라 막부를 참고하여, 3대 싯켄執権 호조 야스토키北条泰時가 무가법인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를 제정했듯이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제정했으며, 더불어 지리적으로 격절되어있는 교토 조정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공가제법도公家諸法度를 제정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손녀인 도쿠가와 마사코徳川和子를 천황의 중궁으로 삼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친왕 한 명을 우에노 칸에이지寛永寺의 주지로 삼아 여차하면 제2의 남북조시대를 거쳐서라도 패망하지 않을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지방세력에 대해서도 일국일성령과 참근교대제로 대표되는 엄격한 통제체제를 갖추어, 에도 막부는 일본 역사상 가장 중앙집권화된 정권이었다. 본질적으로 천황의 권위라는 명분에 기대는 정권이라 할지라도, 이만치 거듭해서 안전장치를 쌓아둔 에도 막부는 과연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통치체제의 모순은 아이러니하게도 에도 막부의 통치이념 중 하나인 유교를 통해 지방세력의 기저에 사상적 폭발력이라는 위험요소를 낳게 하였고, 마침내 흑선내항이라는 계기로 폭발, 존황양이라는 구호와 함께 메이지 유신이 발발, 보신전쟁으로 에도 막부는 패망한다.
